“가부장제를 무너뜨리자”

미국 방송 작가 겸 PD 질 솔로웨이, 아마존의 새 드라마 시리즈 ‘아이 러브 딕’에서 여성을 객체 아닌 주체로 묘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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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솔로웨이는 드라마를 통해 남성이 지배하는 미국 연예계에 페미니즘을 주입시키고자 한다. / 사진·FACEBOOK.COM/JILL.SOLOWAY

미국의 방송 작가 겸 PD이자 코미디언인 질 솔로웨이는 신인 시절 일을 따내기 위해 할리우드의 TV 간부들을 만나고 다니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이 얼마나 허세를 부렸는지를 떠올리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난 그들에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뭔가를 하고 싶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솔로웨이는 곧 스튜디오에 큰돈을 벌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작가만이 작품을 제작할 기회를 얻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혁명적인 말투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2014년 방영을 시작한 아마존의 코미디 드라마 시리즈 ‘트랜스패런트(Transparent)’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커밍아웃한 솔로웨이의 아버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이 작품이 에미상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둔 후 솔로웨이는 다시 선동가로 돌아왔다. 그녀는 지난해 설립한 프로덕션 회사 ‘토플(Topple)’을 통해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자(topple the patriarchy)’ 한다.

솔로웨이는 백인 남성의 주도권을 무너뜨린다는 자신의 목표가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느 프로듀서라면 ‘트랜스패런트’와 ‘식스 핏 언더(Six Feet Under, HBO 드라마 시리즈)’로 그녀가 받은 칭송 정도면 매우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미국 연예계에 페미니즘을 주입시키려는 그녀의 야망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트랜스패런트’에서 솔로웨이는 가능한 한 많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배우와 스태프로 고용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꽤 많은 신인을 탄생시켰으며 창조적인 일에 소외계층을 참여시킬 경우 얻을 수 있는 비판적·상업적 가치를 보여줬다. 솔로웨이는 아마존의 최신 드라마 시리즈 ‘아이 러브 딕(I Love Dick)’에서 스크린에 비쳐지는 여성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호감·섹시함 등)를 저버리고 여성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묘사했다.

‘아이 러브 딕’은 1997년 크리스 크라우스가 쓴 동명의 컬트-클래식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이 책은 회고록과 문화평론을 합쳐놓은 듯한 편지체의 글로 딕이라는 이름의 학자를 사랑하게 된 기혼 여성 영화감독 크리스 크라우스의 이야기다. 책의 대부분이 크리스가 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됐다. 딕에 대한 사랑은 크리스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결혼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크리스의 목소리에서는 독특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알 만한 건 다 안다는 듯한 자신감과 자의식, 지성미와 나약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아이 러브 딕’은 예술과 인생, 인간관계와 여성의 욕망에 관한 책이다.

솔로웨이가 이 소설에서 새 드라마 시리즈의 영감을 얻은 것은 이런 독특한 관점 때문이다. 그녀의 드라마 시리즈 ‘아이 러브 딕’은 크리스(캐스린 한)가 딕(케빈 베이컨)에 대한 욕망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나름의 인생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드라마는 또 텍사스 주 마르파의 예술촌에 사는 다른 여성 캐릭터 몇 명의 삶도 조명한다. “케빈 베이컨을 보려고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솔로웨이는 말했다. “그들은 이 작품이 딕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여성의 목소리와 시각에 관한 드라마로 여성을 중심에 둔다.”

그 목소리와 시각이 어떻게 들리고 보이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솔로웨이는 극작가 애니 베이커와 하이디 슈렝크 등 여성 작가만을 기용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작가진의 이점은 곧 드러났다. “회의 도중 ‘그 이야기는 역겨우니 빼자’ 혹은 ‘그 여자는 헤프고 형편없다. 어떤 여자가 그런 행동을 하나?’ 등의 발언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솔로웨이는 말했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기까지 15년 동안 대본을 써온 솔로웨이는 남성들로부터 그녀가 쓴 여성 캐릭터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 그녀는 “‘아이 러브 딕’의 작가들에게 ‘남자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난 과연 누구일까?’라고 자문할 수 있는 여지를 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아이 러브 딕’의 제작에 참여한 작가 대다수는 현장 분위기가 유난히 민주적이고 공감대가 잘 형성되며 경쟁심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솔로웨이의 작업 현장은 늘 그렇다. 그녀 가까이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할리우드의 관행을 깨고 개방적이고 협동적인 환경을 조성해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솔로웨이는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각자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트랜스패런트’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재커리 드러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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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딕’에서 캐스린 한(크리스 역)은 케빈 베이컨(딕 역)을 사랑하게 되는 기혼의 여자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 사진·AMAZONPRIME

솔로웨이는 이것이 할리우드의 남성 지배적 문화를 ‘모계(matrilineal)’ 문화로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그녀는 ‘가모장(matriarchal)’이라는 용어보다 모계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성별은 정치보다 문화적 유산과 더 관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모장이라는 용어는 “여성만의 시대를 열어 모두가 여성을 숭배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말로 들린다”고 그녀는 말한다].

솔로웨이는 촬영 현장에서 좀 더 개방적이고 평등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명 ‘박스(Box)’ 의식을 도입했다. 매일 아침 배우부터 무대 미술가까지 촬영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빈 사과 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손뼉을 치며 ‘박스, 박스, 박스’라고 외친다. 그중 한두 사람이 상자 위에 올라가 개인적 경험이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들려준다.

미신 의식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참가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고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서로를 배려한다”고 ‘아이 러브 딕’의 공동 프로듀서 사라 거빈스는 말했다. “지난 3개월 동안 어느 누구도 스태프에게 큰소리 내는 걸 듣지 못했다.”

이 모두가 ‘영화 제작의 가부장적 관행’을 깨려는 솔로웨이의 노력이다. 그녀는 진솔한 감정을 담아야 하는 촬영장에서 ‘액션’이나 ‘컷’ 같은 감독의 명령조 외침은 매우 부적절하고 남성 중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배우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남성적인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솔로웨이는 영국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방식과 같은 섬세한 연출 스타일을 선호한다. 아놀드 감독은 촬영을 시작할 땐 부드럽게 “이제 가보죠(Off you go)”라고 말하고 중단할 때는 “이제 됐어요(All right then)”라는 말을 건넨다. 솔로웨이는 리허설 도중에 촬영을 시작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방식은 배우들이 그 장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준다.

영화 제작과 성별의 관계에 대한 솔로웨이의 분석은 그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맞물려 더 흥미롭다. ‘트랜스패런트’ 시리즈를 시작할 때 솔로웨이는 한 남자와 결혼해 아들 한 명을 키우고 있었으며 머리는 적갈색의 웨이브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혼했고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했으며 새치가 드러난 머리를 짧게 잘랐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화장에 긴 시간을 들이는 일이 짜증스럽게 느껴지면서 솔로웨이의 변화는 시작됐다. 그녀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거부감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성공한 남자처럼 행동할 때 존재감을 더 확실하게 느끼고 촬영 현장에서 자신감도 더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J.J. 에이브럼스나 저드 애퍼토 같은 남자 감독들은 자연스럽게 나온 배에 헐렁한 진바지를 입고 낡은 T셔츠를 걸친 채 촬영장에 나타나지만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솔로웨이는 말했다. “그게 몹시 부러웠다. 내 여성성을 지키면서 더 강력한 힘을 원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자기다움에서 편안함을 찾는다고 할까?”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여자 감독이 스스로 ‘덜 여성스러워지기’를 바란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로웨이의 변화는 권위라든지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화적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그녀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

솔로웨이는 자신의 프로덕션 회사 토플과 ‘아이 러브 딕’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과소평가되기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난 스스로 작가이자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내 자신을 어떤 운동의 지도자로 여기는 것은 매우 낯설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매일 아침 나를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이유가 됐다.”

– 에밀리 보로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