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스의 악몽 되살아나나

계엄령 연장한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한 휘두르며 인권 유린 일삼은 독재자의 전철 밟을지 모른다는 우려 커져


마라위시 임시 대피소의 주민들이 반군 근거지를 폭격하고 지나는 군용 헬기를 바라보고 있다. / 사진 : AARON FAVILA-AP-NEWSIS

필리핀 북부 루손 섬 벵게트 주의 휴양도시 바기오에 있는 한 카페에서 메리 루 마리그자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구속된 일을 떨리는 목소리로 돌이켰다. 독재자로 악명 높았던 마르코스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필리핀을 계엄령으로 통치했다. 반정부 시위를 조직한 마리그자는 12개월 동안 고문에 시달렸다. 대부분 전기고문이었다.

그때의 계엄령 악몽이 지금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지난 5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민다나오 섬에 계엄령을 선포하자 마리그자는 옥살이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필리핀인처럼 그녀도 두테르테 대통령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며 인권 유린을 일삼은 독재자 마르코스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두테르테 대통령은 계엄령 비판을 엄단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법원 판결을 일축하겠다고 위협했다.

마리그자는 필리핀 인구의 약 4분의 1(2500만 명)이 거주하며 필리핀 전체 국토 면적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민다나오 섬에 계엄령이 내려진 이래 주민의 유순한 모습에 더욱 낙담했다. 그녀는 “두테르테는 여전히 인기 있는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계엄령 선포 후 주민의 반응이 너무 없다. 심지어 두려움이나 우려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게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모든 필리핀인이 계엄령이나 두테르테 대통령에 관해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다. 마르코스 사후거의 30년 동안 그 일가와 추종자들이 벌인 줄기찬 선전 캠페인으로 많은 필리핀인의 역사관이 왜곡됐다. 그에 따라 그들은 마르코스 통치 아래의 삶을 필리핀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마르코스 일가에겐 좋은 일이다. 또 많은 사람이 두테르테 통치 아래서 그와 비슷한 독재 정부를 용인하기도 더 쉬운 상황이다.

필리핀 여론조사기관 사회기상대(SWS)의 지난 6월 조사에서 필리핀인의 57%가 계엄령 선포를 지지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지도는 그보다 더 높다. 최근의 SWS 조사에 따르면 필리핀인의 78%가 그의 업무수행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결국 필리핀 대법원은 지난 7월 4일 두테르테 대통령의 민다나오 섬 계엄령 선포를 합헌으로 결정함으로써 계엄령을 무효화시켜달라는 야당 의원들의 청원을 기각했다.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두테르테 대통령 지지세력은 압도적으로 계엄령을 옹호한다. 야권이 대부분 마닐라에서 반(反)계엄령 시위를 벌이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3000정의 45구경 권총을 군에 전달하며 IS 추종 반군에 생포될 위기에 처하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말했다. / 사진 : AARON FAVILA-AP-NEWSIS

지난 5월 23일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추종 반군 마우테가 민다나오 섬의 인구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도시 마라위를 점령하자 두테르테 대통령은 민다나오 섬 전역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토벌 작전을 벌이고 있다. 그 직전 필리핀 정부는 마우테의 동맹 세력인 무장단체 아부 사야프의 지도자로 미국 국무부의 테러리스트 수배자인 이스닐론 하필론이 마라위에 숨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체포 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그런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마우테는 마라위의 학교와 교도소를 불태우고 신부 한 명과 신자 열두어 명을 인질로 잡았다.

하필론 체포에 실패한 뒤 필리핀군은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마라위 지역을 공습하고 마우테 대원 수백 명을 사살했다. 두테르테 정부에 따르면 마우테는 민간인과 정부군 장병 수십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로 주민 약 40만 명이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으며 7만 명 이상이 현재 정부가 운영하는 대피소에서 지낸다.

계엄령에 따라 필리핀군은 민다나오 섬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민간인을 영장 없이 체포·구금하고, 통행금지령을 발동하며(일부 지역에서 저녁 9시부터 통행이 금지된다), 민다나오 섬 내부에서 주민의 이동을 감시할 권한을 갖는다. 계엄령은 법원이나 의회, 또는 헌법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지만 비판자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계엄령을 이용해 마르코스 시절과 유사한 독재 체제를 확립하려 들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계엄령으로 두테르테 대통령 아래서 당국의 권한 남용과 인권 유린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그는 계엄령 지역에서 군인들이 여성을 성폭행해도 좋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그는 IS 추종 반군 소탕에 투입된 장병들을 위문하며 “여러분이 여성을 3명까지 강간한다면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해줄 것”이라고 농담으로 말했다).

약 1년 전 대통령에 출마한 두테르테 후보는 마약 사용자와 판매상을 사살함으로써 불법 마약을 뿌리뽑고 범죄를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선출됐다. 필리핀 언론과 인권단체는 그 이래 경찰과 자경단에 의해 7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면서 두테르테 대통령 비판자들 사이에서 이번 계엄령도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확산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대변인은 계엄령이 국가안보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위기를 극복하려면 국민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거듭 촉구하는 동시에 군이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핀 헌법은 계엄령 기간을 60일로 제한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7월 초 계엄령을 해제할 생각인지 묻자 마라위의 상황이 계속 ‘중대한’ 경우 해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필리핀 하원의장으로 두테르테 대통령을 지지하는 판탈레온 알바레스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2년까지 5년간 계엄령을 연장하는 방안을 동료들과 함께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얼굴(왼쪽)과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얼굴(오른쪽)을 합성한 사진을 들고 민다나오 섬의 계엄령 선포에 항의하는 시위대. / 사진 : BULLIT MARQUEZ-AP-NEWSIS

또 두테르테 대통령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6월 “반란 세력이 민다나오 섬이나 다른 지역을 불태운다면 계엄령을 다시 선포할 수밖에 없다”며 “이때는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겠다. 언제 계엄령이 종료될지 알 수 없다. 단 한 발의 총성도 다신 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까지 계엄령을 유지하겠다.”

필리핀인이 계엄령을 지지하는 것은 마르코스 일가와 추종자들의 노련한 선전 캠페인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마르코스 대통령 아래서 1970~80년대 공산당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로 선포된 계엄령이 필리핀에 안정과 발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마르코스 대통령의 계엄령이 지속되는 동안 필리핀군은 최소 3240명을 사살했고, 3만 4000명을 고문했으며, 7만 명을 구금했다. 대규모 시위를 중심으로 한 ‘피플파워’(민중의 힘) 혁명으로 군부마저 등을 돌리자 마르코스는 1986년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 후 민주 절차로 선출된 대통령이 설립한 바른정부위원회(PCGG)는 마르코스 일가가 국고에서 횡령했다고 알려진 100억 달러 중 40만 달러 정도를 회수했다.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 있는 마르코스의 고향 바탁엔 그와 부인 이멜다를 추모하는 공공 사진전시관 세계평화센터가 있다. 하지만 인권 침해나 국고 횡령에 관한 언급은 거기에 없다. 현관 위에 새겨진 글은 이런 내용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이 실시된 기간에 법치를 존중했고 정당한 법 절차를 보장하고 인권을 보호했다. … 그는 계엄령이 발동된 동안이나 그 후 단 한 명의 필리핀인의 사형도 집행하지 않았다.’ 인근의 다른 박물관 3곳(페르디난드 E. 마르코스 대통령 센터, 말라카냥 대통령궁, 마르코스 박물관)도 그 문제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박물관들은 한결같이 마르코스의 업적을 추켜세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마르코스가 일본군과 싸운 것을 보여주는 전시관은 그가 8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주장한다. 마르코스가 어린 시절 친구에게 개미를 죽이지 말라며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개미도 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


지난 5월 마우테가 민다나오 섬의 무슬림 도시 마라위를 점령하자 두테르테 대통령은 섬 전역에 계엄령을 발동했다. / 사진 : BULLIT MARQUEZ-AP-NEWSIS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는 마르코스 일가를 ‘숭배’하는 사람이 많다. 주도 라오아그의 청사에선 부인 이멜다, 장녀 이미(현재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 외아들 봉봉의 실물 크기로 오린 사진이 방문객을 맞는다. 매년 9월이면 노래자랑, 토론대회, 박물관 무료 개방 등의 행사와 함께 성대한 마르코스 생일 파티가 열린다. 일로코스 노르테 주정부의 공보관 훈 구도이는 “마르코스가 우리 주에 많은 것을 가져다 줬고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선전과 마르코스 시절 마닐라에 세워진 여러 돋보이는 인프라(필리핀 문화센터, 필리핀 심장센터 등으로 비판자들은 그가 축재에 사용했다고 지적한다)로 인해 일로코스 노르테 주민 다수는 마르코스를 숭배한다. 은퇴한 교사로 그곳에 오래 거주한 호세리토 롤린코는 “필리핀인이 마르코스 치하에서 규율을 좀 더 잘 지켰고 사회가 안정됐기 때문에 다시 계엄령이 선포돼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필리핀 전역에 마르코스 지지자가 많은 것은 선전 효과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들어선 역대 정부가 약속대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필리핀인 다수가 정부를 불신하게 됐다는 얘기다. 마닐라 소재 마르코스 반대단체인 ‘블록 마르코스’의 대변인 틴 알바레스는 “마르코스 시절 이후에도 필리핀인은 정부의 의미 있는 변화를 못 봤다”고 지적했다. “부패와 극단적인 빈곤, 불평등이 여전하다. 삶의 모든 기본적인 품위가 마르코스 시절 짓밟혔던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필리핀은 동남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지만 고질적인 부패와 빈곤이 계속 발목을 잡는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필리핀인의 21.6%는 국가의 빈곤선 아래서 생활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지난해 부패지수 순위에서 필리핀을 176개국 중 101위로 평가했다.

이런 상황이 필리핀인 사이에서 마르코스 독재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따라 계엄령이 필리핀의 국가 시스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르코스 지지자로 일로코스 노르테주의 국가청년위원회 위원장인 제임스 벤투라는 “마르코스의 긍정적인 기여보다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면 필리핀 사회는 계속 분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아들을 야단치는 것처럼” 때론 계엄령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마닐라에서 계엄령 연장 요구에 항의하는 시위대.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7월 18일 민다나오 섬의 계엄령을 일단 연말까지 연장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해 승인받았다. / 사진 : BULLIT MARQUEZ-AP-NEWSIS

많은 필리핀인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 지난 3월 필리핀의 여론조사기관 펄스 아시아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가의 많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계엄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리핀인의 비율이 20%였다. 루손, 민다나오와 함께 필리핀의 주된 3개 섬 중 하나인 비사야 지역에서 계엄령 지지도가 36%로 가장 높다.

마르코스 선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열정은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가장 강하지만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에선 마르코스를 중립적이거나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교에서 그렇다.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의 호세 티롤 역사학 교수(지난해 이 대학에서 계엄령 과정을 개설했다)는 “고등학교 교과서는 마르코스 문제를 대부분 회계처럼 처리한다”고 말했다. “회계 장부에 차변과 대변이 있듯이 그가 잘한 일은 이것이고 잘못한 일은 저것이라는 식이다. 두 가지를 종합해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보면 그래도 그가 잘한 점이 많다는 결과가 나온다.”

지난해 마르코스의 외아들 봉봉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필리핀 부통령에 출마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마르코스 선전을 정치 담론의 주변부에서 주류로 끌어들였다. 일례로 지난해 2월 페이스북에서 음모론을 제기한 마르코스 지지자도 있다. 마르코스의 정적이던 니노이 아키노가 필리핀에 정치 불안을 조장해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유도했다는 내용이었다. ‘계엄령 따라잡기’라는 제목의 그 글은 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역사를 수정하고 마르코스의 명예를 회복시킬 목적으로 소셜미디어에 등장한 수천 가지 게시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두테르테 대통령 지지자인 봉봉 마르코스 후보는 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후보에게 26만300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패했지만 대법원에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해 아직 검토가 진행 중이다. 한편 마르코스 일가는 인권 유린과 횡령, 부패에 관한 비난에 대해 결백을 주장한다. 그와 관련된 소송도 진행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르코스를 추켜세우며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그는 필리핀 전역에 계엄령을 확대하는 방안을 시사한 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계엄령이 매우 좋았다”며 계엄령이 확대되면 ‘마르코스를 모방하는 셈’이라고 표현했다. 마리그자는 그 때문에 우려가 크다. 그녀는 “이전에 배웠어야 마땅한 정치적 교훈을 두고 또다시 불안과 내분을 겪어야 하는 미래가 그려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앞날을 낙관한다고 덧붙였다. “우리 필리핀인은 궁극적으로 계엄령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브레넌 웨이스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