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사의 소박한 꿈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덤에 오른 그웬돌린 크리스티, 190㎝ 장신으로 사령관·경찰관 등 남성적인 역할 도맡아
크리스티는 어려서부터 “여성은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 따분한 역할만 맡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영국 출신 여배우 그웬돌린 크리스티(38)는 키가 굉장히 크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미국 HBO 방송) 팬들에게는 놀랄 일도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크리스티는 책임감 강하고 용감한 전사 ‘타스의 브리엔’으로 나온다.

하지만 최근 런던의 바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190㎝나 되는 키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왕좌의 게임’은 조지 R. R. 마틴의 인기 판타지 소설 시리즈 ‘얼음과 불의 노래’를 바탕으로 했다. 이 시리즈는 현재 5편까지 출판됐고 앞으로 2편이 더 나올 예정이다. 소설의 배경은 중세 시대 가공의 대륙 웨스테로스다. 일곱 왕국의 지도자들이 철의 왕좌를 차지하려고 좀비 군단과 용, 그리고 서로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 2011년 방영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지금까지 총 38개의 상을 획득해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다. 또한 작품 내용과 관련해 소셜미디어에서 각종 밈과 이론들이 나돌았으며 과도한 폭력(전투에서 사람 머리가 잘려나가고 여자들이 산 채로 불태워지며 남자들이 거세당한다)과 성폭행 등 불필요한 섹스 장면은 온라인 상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인상적인 캐릭터가 워낙 많이 등장해 1회 평균 시청자 수가 2300만 명에 이른다. ‘매드 퀸’ 세르세이(레나 헤디)와 음울한 영웅 존 스노우(키트 해링턴), 그리고 크리스티가 연기한 브리엔이 대표적이다. 크리스티는 신체적 조건 덕분에 일찌감치 제작진의 눈에 들었다. 애독자들은 오디션 당시 비교적 덜 알려진 배우였던 그녀에게 이 역을 맡기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크리스티는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고 영화나 TV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즌 2 에피소드 3에서 브리엔이 등장해 노련한 남성 전사를 제압하고 렌리 바라테온의 호위무사가 되는 순간부터 크리스티(그리고 브리엔)는 ‘왕좌의 게임’ 인기 순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크리스티는 브리엔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힘과 중성적인 매력에 곧 매료됐다. 햄프셔 근처의 조그만 해변 마을에서 자란 크리스티는 “난 어려서부터 여성은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 따분한 역할만 맡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틀에 박힌 듯 보였다. 그들은 주로 아름다운 존재로 묘사됐다. 난 처녀와 매춘부, 어머니와 성적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틴의 소설에서 브리엔은 ‘못생기고 여자답지 않은’ 캐릭터로 묘사된다. 2부 ‘왕들의 전쟁’에서 마틴은 이렇게 썼다. ‘브리엔은 얼굴이 넓적하고 입이 크다. 튀어나온 치아는 삐뚤빼뚤하고 입술은 두툼해서 마치 부은 듯 보인다 … 게다가 콧대는 중간에서 2번 이상 꺾였다.’ 브리엔은 무자비하게 괴롭힘을 당한다. 크리스티는 그 역할을 하면서 외모 때문에 따돌림당했던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이 역할을 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갑옷을 처음 입던 때가 생각난다. 외모를 완전히 바꿨다”고 그녀는 말했다. 크리스티는 브리엔 역할을 위해 근육량을 약 13㎏ 늘리고 검투와 승마를 배웠다. “난 내 중성적인 이미지와 큰 키, 따돌림당한다는 느낌 등 늘 불편하게 여겨 왔던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역할은 내게 자신감을 키워줬다.”

크리스티는 그동안 고정적인 이미지의 배역들을 맡아 왔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무시무시한 전사 역할을 하니 좋은 점도 있었다. 2015년 그녀는 ‘헝거게임: 더 파이널’의 라임 사령관 역과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캡틴 파스마 역(크리스티는 오는 12월 개봉하는 ‘스타워즈: 더 라스트 제다이’에서도 같은 역으로 나온다)을 따냈다. 하지만 크리스티가 제인 캠피언 감독의 미니시리즈 ‘탑 오브더 레이크’(영국 BBC 방송) 시즌 2에서 좀 더 현실적인 역할을 따낸 것은 그녀의 실제 모습에서 엿보이는 대담함 덕분인 듯하다.

‘피아노’(1993) 등 캠피언 감독의 영화에서 큰 영향을 받은 크리스티는 2013년 ‘탑 오브 더 레이크’ 시즌 1을 본 뒤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18개월 동안 그냥 지니고 있었다”고 크리스티는 말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과 캠피언 감독 두 사람을 다 아는 친구를 통해 그 편지를 전했다. “캠피언은 짤막하지만 다정스런 답장을 보냈다”고 크리스티는 말했다. 그리고 4개월 후 캠피언 감독이 다시 편지를 보내 “당신에게 맡길 역할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왕좌의 게임’ 시즌 6에서 브리엔으로 분한 크리스티(왼쪽)가 대니얼 포트먼(가운데), 클라이브 러셀과 함께 연기를 펼치고 있다

크리스티는 주인공 엘리자베스 모스의 동료 형사 역할인 나약하고 궁지에 몰린 미란다를 연기한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늘 실패만 하고 그런 상황을 극복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매우 어렵다. 하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이 느끼는 좀 더 현실적인 감정이다.”

‘스타워즈’와 ‘왕좌의 게임’은 제작 과정에서 비밀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크리스티는 그들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못했다. ‘왕좌의 게임’의 마지막 13개 에피소드는 두 시즌으로 나뉘어 방영된다. 7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즌 7은 지난 7월 16일(미국) 시작됐고, 시즌 8(6개 에피소드)은 내년에 방영된다.

“일반적인 이야기밖엔 할 수 없다”고 크리스티는 말했다. “‘왕좌의 게임’은 캐릭터들이 이런저런 조합으로 만나고 헤어지면서 의외의 결과를 낳는 걸로 유명하다. 브리엔의 경우엔 처음에 적대적이던 사람들과 유대를 형성하고 마지못해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일이 많았다. 이번 시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브리엔은 깊은 동지애를 깨닫게 된다.”

‘탑 오브 더 레이크’ 시즌 2에서 크리스티는 뉴질랜드 경찰관으로 나온다.

온라인 상에서는 그 동맹 관계가 토문드 자이언츠베인(크리스토퍼 히뷰)과 이뤄질 것이라는 추측이 나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크리스티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시청자들은 지난 시즌에 토문드가 브리엔을 감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대본에 ‘토문드는 여태껏 이런 여자를 본 적이 없다’는 지문이 쓰여 있었던 것 같다”고 크리스티는 말했다. 그저 지나가는 한 대목이었을 뿐이지만 히뷰는 그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크리스티는 저녁 식탁에서 토문드가 닭다리를 게걸스럽게 뜯어먹으면서 건너편에 앉은 브리엔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촬영 도중에 잘 웃지 않는데 그때는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히뷰의 연기가 너무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미래를 묻는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브리엔이 정말 토문드를 좋아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난 “아니다”고 답했고 그녀는 “맞다”고 말했다.

일부 팬들은 그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재회하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유머 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브리엔과 왕을 살해한 익살꾸러기 외팔이 제이미 라니스터(니콜라이 코스터-왈도)를 말한다. 브리엔은 지조 있는 여인이지만 제이미는 쌍둥이 누나 세르세이와의 사이에 자식을 셋이나 뒀다. 제이미의 가장 영웅다운 행동을 이끌어낸 사람이 바로 브리엔이다. 시즌 3 에피소드 7에서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한 브리엔을 구하려고 곰 우리에 뛰어들었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로 가득 찬 이 드라마에서도 가장 짜릿했던 순간 중 하나다.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 신의와 우정이 싹텄을 뿐 아니라 코스터-왈도와 크리스티의 호흡도 잘 맞는다. 브리엔과 제이미가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크리스티는 그 답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웃어넘기지도 않았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크리스티가 바라는 브리엔의 앞날은 어떤 것일까? 그녀는 전쟁에 지친 브리엔이 홀로 말을 타고 웨스테로스의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꿈꾼다. 브리엔의 종자 포드릭이 그 뒤를 바짝 따른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나 원하는 미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한참 생각하더니 브리엔의 조상이 살던 곳으로 가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 투파옐 아메드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