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는 ‘아메리칸’ 없이는 못 찍어

제목에 ‘아메리칸’ 들어간 영화·드라마는 좌익·우익 모두에 먹혀
마이클 키튼은 ‘아메리칸 어쌔신’에서 주인공 스탠 헐리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사진:CHRISTIAN BLACK-LIONSGATE FILMS

요즘 미국 영화관에선 ‘아메리칸 메이드’ ‘아메리칸 어쌔신(11월로 예정된 국내 개봉 제목은 ‘어쌔신: 더 비기닝’) ‘스티브 맥퀸: 아메리칸 아이콘’ 등이 속속 개봉되고 있다. 안방에선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7’ ‘아메리칸 하우스와이프 시즌2’ ‘아메리칸 반달리즘’이 방영된다. 9월만 따져도 ‘아메리칸’이 들어간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이렇게 많다.

지난해 나온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갓 시즌2’ ‘아메리칸 플레이보이’ ‘아메리칸 크라임’ ‘아메리칸 아나키스트’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 ‘아메리칸 그릿’ ‘아메리칸 에픽’ ‘아메리칸 사탄’ 등등.

북미에서 9월 15일 개봉된 ‘아메리칸 어쌔신’에서 공동 주연을 맡은 마이클 키튼은 “제목에 ‘아메리칸’이 붙은 작품이 진짜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단어를 쓰는 데 좀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제목에 ‘아메리칸’이 들어간 작품의 대본을 하나 더 받았는데 맡지 않기로 했다.”

넷플릭스는 9월 15일 실화 범죄 패러디 8편으로 구성된 드라마 ‘아메리칸 반달리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 사진:YOUTUBE.COM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는 이런 추세는 1925년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1950년대 ‘젊은이의 양지’로 영화화된 이 작품은 섹스·폭력과 ‘미제(Made in USA)’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인상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 후 ‘아메리칸 패스토럴’ ‘아메리칸 사이코’ ‘아메리칸 지골로’(1980년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리처드 기어의 아메리칸 플레이보이’) ‘아메리칸 뷰티’ ‘아메리칸 파이’ 등이 뒤를 이었다. 전부 책과 영화로 크게 히트했다. 그런 상업적인 성공이 시대 상황과 관련 있을까? ‘아메리카’의 뜻을 두고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 단어는 오히려 골칫거리가 아닐까?

기호학자로 잡지 ‘n+1’에 영화평을 기고하는 A. S. 함라는 그와 정반대라고 말했다. “할리우드는 좌익과 우익 양측 모두에게 먹혀드는 주제를 선호한다. ‘아메리칸’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면 이민 배척주의나 맹목적 애국주의를 연상시키고 특별히 중요한 것 같은 느낌을 줘 우익이 열광할 수 있다. 반면 좌익의 경우 그런 제목을 보면 불길하고, 무겁고, 어둡고, 사악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끌린다. ‘아메리칸’은 이처럼 정치·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의미 부여와 감정이입이 가능한 용어로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각본가이자 영화 감독인 맥스 랜디스는 제목에 ‘아메리칸’이 들어가는 오락물 3편[영화 ‘아메리칸 울트라’, 드라마 ‘아메리칸 에일리언’, 그리고 그의 부친이 각본을 쓴 영화 ‘런던의 늑대 인간’의 리메이크]을 제작했다. 그는 제목이 ‘용감한 영웅의 조국’으로 연상되는 미국과 연결되면 불안을 부추길 수 있는 주제를 완화시키고 좀 더 친근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아메리칸’은 섬뜩한 단어에 첨가하는 양념과 비슷하다. 그냥 ‘스나이퍼’라고 하면 위험하고 이질적인 저격수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라고 하면 친근하다. 또 ‘아메리칸 에일리언’이라고 하면 원초적인 모순 어법이다. 따라서 ‘그게 뭐야’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아메리칸’이 붙은 제목이 끝없이 나오는 걸 보면 아직 포화상태에 도달하진 않은 듯하다. 실화 범죄 패러디 8편으로 구성된 드라마 ‘아메리칸 반달리즘’의 공동 제작자인 토니 야센다는 “사람들이 ‘아메리칸’이라는 단어를 비웃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줄어들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화는 풍자와 패러디를 통해 이뤄진다.”

– 크리스 리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