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후 스타 이소룡은 어떻게 사망했나

뇌부종·독살 등 사후 4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미국 로스앤젤레스 차이나타운에 세워진 브루스 리 동상. / 사진:XINHUA-NEWSIS

브루스 리(리샤오룽·이소룡)는 액션영화 스타 그 이상이었다. 그는 단 4년의 배우활동을 통해 영화 5편을 찍었을 뿐이지만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때까지 새로운 유형의 영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94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브루스 리는 생후 3개월 때 부모의 고향인 홍콩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리호이취엔은 홍콩의 유명한 경극배우이자 영화배우였다. 브루스 리는 어려서부터 홍콩 영화에 출연했고, 18세에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대학에 다니다 중퇴한 뒤 미국 여성 린다 에머리와 결혼했다.

브루스 리는 무엇보다 쿵후의 고수였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무술 ‘절권도’(주먹을 차단하는 방법이라는 뜻)를 창시했다. 유라시아계 어머니를 둔 홍콩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자신의 무술을 다양한 배경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인종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의 무술은 무차별적인 폭력이 아니라 유연성과 우아함, 정확성을 강조했다. 그는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1960년대 ABC 방송의 드라마 시리즈 ‘그린 호넷’에서 마스크를 쓴 주인공의 단짝 케이토를 연기하면서 미국에서 첫 액션 배우 역할을 맡았다.

영화 비평가 릭 마이어스는 과거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의 모든 아이들이 ‘그린 호넷’에서 발차기와 펀치를 날리며 놀라운 액션을 보여주는 그를 주목했다”며 “모든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고 말했다. “‘그린 호넷’ 제작진은 브루스 리가 무술 실력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지 않도록 억제시키느라 애썼다. 편집하기 전의 필름을 볼 때마다 그의 현란한 액션에 다른 모든 요소가 가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린 호넷’은 미국 사회에 쿵후를 처음 선보인 드라마였다. 브루스 리는 그 드라마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의 만화 주인공 같은 이미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린 호넷’ 시리즈가 26편으로 막을 내리자 그는 홍콩으로 돌아갔다. 홍콩에서도 ‘그린 호넷’이 큰 인기를 끌면서 국민 배우로 대접 받은 그는 홍콩에서 잇따라 무술영화를 찍었다. ‘당산대형’과 ‘정무문’에 이어 1972년엔 자신이 대본을 쓰고 프로듀서·감독·주연을 모두 맡은 영화 ‘맹룡과강’이 나왔다. 이런 영화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흥행하자 할리우드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1972년 가을 워너브라더스가 그에게 ‘용쟁호투’를 찍자고 제안했다. 미국의 주요 제작사와 합작한 그의 첫 영화였다. 1973년 1월 홍콩에서 촬영이 시작됐을 때 기대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용쟁호투’가 개봉되기 6일 전인 그해 7월 20일 브루스 리는 갑자기 사망했다. 사인은 뇌부종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였다. ‘용쟁호투’가 그해 최고 흥행 영화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미국에서 쿵후 열풍이 촉발된 데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도 한몫했을 수 있다. 하지만 강인한 체력과 체격을 가졌던 젊은이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또 불가해하게 죽을 수 있을까? 이 의문은 그의 무술 실력만큼이나 브루스 리를 특별한 스타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홍콩 조직폭력단 삼합회가 연루됐다, 그의 가문이 저주에 걸렸다, 닌자가 독살했다는 등 근거 없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기혼자인 그가 은밀하게 만나던 여자친구 베티 팅(대만 출신 여배우)의 집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뜬소문을 부채질했다. 게다가 1993년 그의 아들 브랜던 리마저 영화 ‘크로우’를 찍던 중 촬영장에서 총기 오발사고로 숨지면서 또다시 억측이 쏟아졌다.

브루스 리의 사망 후 지난 45년 동안 과학자와 전기 작가, 팬들은 끊임없이 사실과 소문 양쪽을 낱낱이 파헤치며 무엇이 그의 뇌부종을 일으켰는지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을 내놨다. 브루스 리의 비극적인 죽음에 관해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공식 사인은 뇌부종

브루스 리의 공식적인 사인은 뇌부종이었다. 뇌세포 내 외에 수분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돼 뇌의 부피가 커진 상태를 가리킨다. 사망시 그의 뇌가 거의 13% 팽창했지만 검시관은 외상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뇌부종을 일으켰을까?

그의 건강 이상 조짐은 사망하기 몇 주 전인 1973년 5월 처음 나타났다. 홍콩의 스튜디오에서 편집 작업을 하던 중 심한 두통과 간질 비슷한 발작으로 병원에 실려간 그는 처음 뇌부종 진단을 받았다. 그는 다음날이 돼서야 의식을 찾았고 추가 검사를 위해 바로 비행기에 실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로스앤젤레스) 메디컬 센터로 이송됐다. 매튜 폴리가 쓴 전기 ‘브루스 리의 생애(Bruce Lee: A Life)’에 따르면 의사들은 그가 대발작(의식이 소실되고 온몸의 근육이 수축되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발작)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지만 그 원인은 확인할 수 없었다. 부종이 가라앉자 그는 다시 건강을 되찾은 듯 보였고 전혀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곧 그는 미국을 떠나 홍콩에서 지냈다.

홍콩의 7월 20일은 무더운 날씨를 제외하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다. 브루스 리는 오전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다음 영화 ‘사망유희’와 관련해 회의를 가졌다. 그는 한 친구와 해시시(마약의 일종인 대마수지)를 약간 복용했다(그는 해시시가 의식을 넓혀준다고 믿었다). 그런 다음 오후 일찍 베티 팅의 아파트로 갔다. 전기 작가 폴리에 따르면 브루스 리와 베티 팅은 섹스를 즐긴 다음 해시시를 좀 더 복용했다. ‘사망유희’의 제작자였던 레이먼드 차우가 오후 6시쯤 아파트에 왔다. 그때 이미 브루스 리는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차우는 폴리에게 “그의 컨디션이 매우 나빴다”고 돌이켰다. “우린 물을 좀 마셨다. ‘사망유희’ 줄거리를 의논하면서 그가 실제로 액션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연했기 때문에 피곤하고 목이 말랐던 것 같다. 물을 몇 모금 마시더니 그는 어지러워했다.”

곧 브루스 리는 두통을 호소했다. 그래서 팅이 그에게 에콰제식 알약을 줬다. 진정제와 진통제가 혼합된 약으로 이전에도 복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팅의 침실에 가서 누웠다. 약 2시간 뒤 팅이 그를 깨웠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구급요원들이 도착했을 때 브루스 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용쟁호투’는 1973년 브루스 리가 사망한 지 몇 달 뒤 개봉됐다. / 사진:GOLDEN HARVEST/ WARNER BROS

부검

며칠 뒤 홍콩의 퀸엘리자베스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됐다. 검시관 R.R. 라이세트 박사는 브루스 리의 시신에서 해시시와 에콰제식만 발견했을 뿐 달리 의심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적인 사인이 ‘뇌부종과 뇌충혈’이지만 뇌 부종의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브루스 리는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하면서 채소·쌀밥·생선·우유만 먹고 정제 밀가루 음식과 설탕을 피하는 식사요법을 철저히 지켰다. 가끔씩 해시시를 즐겼지만 술·담배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처음 뇌부종을 일으켰을 때 고비를 넘긴 건 사실 기적이었다. 하지만 뇌부종이 재발했을 때는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다. 뇌부종은 매우 위험한 증상으로 머리 부상이나 알레르기, 뇌종양 같은 여러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건장했던 젊은이가 어떻게 그토록 갑자기 불가해하게 사망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과연 무엇이 브루스 리에게 치명적인 뇌부종을 일으켰을까? 라이세트 박사는 “약물특이체질(약물이 유전학적 원인으로 비정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체질)이거나 해시시 과다복용에서 비롯된 중독이 사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해시시와 뇌부종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알려졌으며 대다수 연구자는 해시시를 치명적일 정도로 과다복용할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브루스 리가 사망한 지 두 달 뒤인 1973년 9월 법의학 전문가 도널드 티어가 그 사건을 맡았다. 지미 헨드릭스(미국 최고의 기타 연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27세였던 1970년 약물 과다복용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의 부검을 담당했던 티어는 브루스 리가 에콰제식의 활성 성분에 과민증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는 에콰제식보다는 해시시가 원인이라고 믿는다.

그해 5월 처음 뇌부종이 왔을 때 그를 치료한 의사들은 그가 그날도 해시시를 복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의료진 중 한 명이었던 피터 우 박사는 2000년 출간된 전기 ‘브루스 리의 도(The Tao of Bruce Lee)’에서 “퇴원에 앞서 그에게 해시시를 다시는 복용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고 밝혔다. “우린 그에게 체지방이 아주 적기 때문에 약물에 취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 박사는 또 그의 스트레스 수준이 해시시의 효과를 증폭시켰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린 그에게 이번에도 위험했지만 다음엔 진짜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브루스 리가 부검에서 발견된 약물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에 과민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는 해시시와 에콰제식을 복용했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다른 뭔가가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을까?

브루스 리는 ‘사망유희’를 완성하기 직전 사망했다. 사진은 말레이시아 밀랍 박물관에 전시된 브루스 리 밀랍 모형. / 사진:NEWSIS

새로운 소문들

수년에 걸쳐 다양한 가설이 등장했다. 1975년 열린 한 행사에서 척 노리스(‘맹룡과강’에서 브루스 리의 상대역을 맡았던 액션 배우로 그의 관을 운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는 팅이 그에게 항생제를 줘서 그 약이 그가 허리 통증 때문에 복용하던 약과 반응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 가설은 부검 결과와 상충됐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무성했는지 잘 보여준다. 풍수가 나빴다는 설부터 마법의 저주에 걸렸다는 소문까지 온갖 괴담이 다 나왔고, 그의 죽음이 영화 ‘사망유희’를 홍보하려는 속임수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브루스 리 영화의 쿵후 판타지도 그의 죽음에 관한 소문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일본 무술 고수들이 닌자를 고용해 그를 독살했다는 가설도 등장했다. 전기 작가 알렉스 벤 블록은 1974년 “중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인 앙금도 있었지만 브루스 리는 특히 일본의 가라테와 유도를 혐오했다”고 지적했다.

언론은 브루스 리가 사망한 뒤 팅을 무자비하게 뒤쫓았다.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며 그녀가 지나친 섹스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가설도 제시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선정적인 연예신문을 소유한 패트릭 왕사이유는 2016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신문에 브루스 리가 섹스 도중 발기한 채로 사망했다는 설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시체 안치소 직원에게 200달러의 뇌물을 주고 부르스 리의 시신 사진을 찍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인 추정

브루스 리의 사망 이후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그의 사망 원인에 관해 더 많은 추측이 쏟아졌다. 2006년 미국 과학협회 학술대회에서 법의학자 제임스 필킨스는 브루스 리의 죽음이 ‘뇌전증(간질)으로 인한 원인불명 돌발사망(SUDEP)’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간질이 있긴 하지만 건강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고 그 원인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용어는 브루스 리가 사망한 지 20년 이상이 지난 1995년 만들어졌다. 발작은 스트레스로 촉발될 수 있으며 브루스 리는 스트레스가 많았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간질 진단을 받은 적이 없다.

전기 작가 폴리는 또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브루스리가 열사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폴리는 ‘브루스 리의 생애’에서 그가 카메라 앞에서 땀을 많이 안 흘리는 것처럼 보이려고 겨드랑이 땀샘을 제거했다며 홍콩에서 무더운 날 무술 대결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연하면서 몸이 견디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현기증과 두통 등 그가 사망한 날 보인 증상은 열사병과 일치한다. 또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뇌부종이 발견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구나 그에게서 처음 뇌부종 증상이 나타났을 때 그는 냉방이 안 되는 무더운 편집실에 있었다. 열사병도 간질처럼 당시엔 지금만큼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의사들이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기에 그 이론이 다른 가설보다 한층 더 비극적으로 비칠 수 있다. 성공과 완벽한 몸을 추구하던 브루스 리가 가장 기본적인 면에서 자기 몸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브 워틀링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