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하늘에 잠들다

세상을 떠난 프린스는 성별과 장르, 인종과 상상력의 장벽을 깬 뮤지션으로 팝 음악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

1
2007년 슈퍼볼 공연에서 프린스는 ‘Purple Rain’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내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의 전설적인 팝 아이콘 프린스가 지난 4월 21일 미네소타 주 챈허슨에 있는 페이즐리 파크 녹음 스튜디오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흘러도 이 소식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우리는 프린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프린스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인 문화의식이 그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프린스는 영원불변의 존재로 보였다. ‘When Doves Cry’ 뮤직 비디오에서 프린스가 안개 피어오르는 욕조에 누웠을 때 우리는 그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기보다는 어느 행성에서 왔을까 궁금했다.

음악계로선 슬픈 해인 2016년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팝이 영원불변하다는 생각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불멸의 초자연적 존재처럼 보이던 아티스트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프린스의 팬들은 믿어지지 않는 일에 익숙하다. 비록 지금까지는 이렇게 슬픈 경우는 없었지만 말이다.

믿어지지 않는 일 1: 프린스는 자신의 기이한 면모를 한층 더 드러낸 1980년 앨범 ‘Dirty Mind’에 실린 모든 곡을 직접 작곡하고 노래하고 제작했다. 단 2곡의 신시사이저를 제외하곤 모든 곡에서 악기도 직접 연주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 2: ‘Dirty Mind’(1980)와 ‘Controversy’(1981), ‘1999’(1982), ‘Purple Rain’(1984) 등 주옥 같은 앨범들이 4년도 안 되는 기간에 연속적으로 나왔다. 팝 음악 역사상 어떤 아티스트도 이런 걸작 앨범들을 연속해서 내놓은 적이 없다.

믿어지지 않는 일 3: 프린스는 2007년 슈퍼볼 공연에서 ‘Purple Rain’으로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보라색)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앨 고어 전 미 부통령의 부인 티퍼 고어(현재 두 사람은 별거 중이다) 역시 1980년대 중반 딸이 ‘Darling Nikki’(프린스가 1984년 발표한 곡)를 듣는 걸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내 귀를 의심했다”고 티퍼는 돌이켰다. 분명히 칭찬은 아니었다. 잡지를 보면서 자위하는 ‘섹스광’ 니키의 이야기를 다룬 에로틱한 가사에 격분한 티퍼는 ‘학부모 음악 자원 센터’를 공동 설립했다. 그리고 노골적인 노래 가사에 대한 표시법을 강화하기 위한 로비를 벌였다. 프린스의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지만 영향력이 컸다. 자신의 남성성을 왜곡한 그의 노래는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수많은 팬들의 성적 자각에 도움을 줬다.

프린스는 두려움을 모르는 관능적 표현과 우주에서 온 듯한 파격적인 분위기로 팝 스타의 영역을 확장했다. 데이비드 보위(프린스보다 3개월 먼저 사망했다)처럼 프린스도 성별과 장르, 인종,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력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프린스의 영향력은 무궁무진하다. 프린스가 없었다면 아웃캐스트나 디 안젤로, 미구엘 같은 훌륭한 뮤지션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또 퀘스트러브의 삶을 바꿔놓았으며 스티비 닉스가 ‘Stand Back’을 작곡할 때 영감을 줬다. 또한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의 경쟁은 두 사람 모두에게 더 큰 발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시네이드 오코너는 1990년 프린스의 노래 ‘Nothing Compares 2 U’를 리메이크해 명성을 얻었다. 프린스는 또 배니티부터 모리스 데이까지 많은 후배 가수를 후원했다. 우리는 또 칸예 웨스트(종종 프린스의 파티에 게스트로 초대됐다)의 음악 활동 방식에서 프린스와 같은 인습타파주의자로서의 고집을 엿볼 수 있다. 웨스트가 통상적인 음반 발표 전략에 강한 혐오감을 드러낸 최근의 사례가 특히 그렇다(2001년의 프린스를 생각해 보라).

프린스는 80년대 초 주류 팝계의 왕좌에 오르면서 팝 음악의 규칙을 새로 쓰기 시작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다시 고쳐 썼다. 신성과 신성모독을 결합시킨 역사적인 앨범 ‘Purple Rain’은 20세기 말 팝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안내서 같은 작품이다. 프린스는 ‘팝 슈퍼스타’와 ‘기타 천재’가 상호배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또 베이스 라인 없이 빌보드 차트 1위의 히트곡(‘When Doves Cry’)을 만들었다. 그리고 근친상간(‘Sister’)과 핵 폐지(‘1999’), 성 왜곡적인 판타지(‘If I Was Your Girllfriend’)를 주제로 팝송을 만들었다.

프린스는 점점 더 괴짜가 돼 갔고 그 기이함은 ‘Purple Rain’과 ‘Kiss’로 다가섰던 주류 청중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 말이 전환점이었다. 프린스는 ‘Sign o’ the Times’의 후속작으로 준비하던 ‘The Black Album’을 마지막 순간에 저버렸다. 엑스터시(마약의 일종)로 인한 환각이나 영적 계시로 그 앨범이 사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빈 자리를 영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한 ‘Lovesexy’가 대신했다.

1990년대는 더 안 좋았다. 프린스는 창작자로서 음악에 대한 권리를 놓고 워너브러더스와 분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이 불가능한 상형문자로 바꾸고 시장성 없는 일련의 음반을 발표했다.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작품(‘The Gold Experience)’부터 형편없는 졸작(‘Chaos and Disorder’)까지 질이 천차만별이었다.

1999년 이후 프린스는 페이즐리 파크의 자택과 녹음실 안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회원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앨범 여러 장을 발표했다. 사생활도 굴곡이 많던 시기였다. 15년 연하의 마이테 가르시아와 결혼했던 그는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1996년 희귀한 유전질환으로 사망한 뒤 이혼했다.

하지만 프린스는 말년에 다시 예전의 자리로 돌아왔다. 일반적으로 그의 컴백 시점을 2004년 앨범 ‘Musicology’를 발표하고 순회공연에 나섰을 때로 꼽는다.

그러나 프린스가 젊은 세대에 폭넓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더 나중이었다. 프린스는 인터넷에 애증이 엇갈리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지만 디지털 영역은 그의 음악을 감상하는 강력한 수단이 됐다. 최근에는 프린스의 슈퍼볼 공연이나 ‘Breakfast Can Wait’ 뮤직 비디오,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부르는 영상 등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다. 최근 시상식에 등장한 프린스의 모습은 인터넷 밈 제작자들에게 좋은 소재가 됐다. 프린스는 또 뒤늦게 트위터와 인스타그램(‘Princestagram’)을 시작해 팬들과 직접 대화했다. 하지만 신비스런 분위기는 여전했다.

프린스는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이유다. 그는 지난해 말 39번째 정규 앨범 ‘HITnRUN Phase Two’를 타이달(Tidal,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발표했다. 올 초 몇 개월은 ‘피아노 & 마이크로폰’ 투어 계획과 공연으로 보냈다. 사망하기 일주일 전에도 공연했다. 연주 곡목에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도 들어 있었다.

지난 4월 15일 프린스는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공연을 마치고 전용기로 이동하던 중 몸이 불편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나중에 한 측근은 프린스가 몇 주일 동안 독감을 앓아 왔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인 16일 토요일 밤 페이즐리 파크에서 열린 댄스 파티에 모습을 드러낸 프린스는 그의 와병설로 걱정하는 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졌다.

“아직은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며칠만 더 기다리세요.” 프린스의 명복을 빈다.

– 잭 숀펠드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