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마음에도 옷을 입히다

영국 런던의 맞춤양복 전문가 테리 헤이스트, 고객 심리 꿰뚫는 능력으로 에든버러 공작 등 상류층 저명인사를 단골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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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헤이스트는 “고객이 원하는 옷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옷을 맞춰 입는 건 인상 깊은 경험이다. 내겐 30년 단골인 양복점이 있는데 잘 만든 코트나 바지가 주는 기쁨은 마법처럼 지속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 중에도 좋은 옷의 힘을 찬양한 사람이 많다.

영국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옷을 완벽하게 잘 입었다는 느낌은 종교로도 얻기 힘든 내면의 고요를 선사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구절은 에머슨의 1875년 수필집(‘Letters and Social Aims’)에 나온 인용문이다. 에머슨은 자신이 ‘존경심을 갖고 경청하는 한 여성’이 그 말을 했다고 썼다.

하지만 에머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예의 바르고 재능 있는 남자라면 옷을 아무렇게나 입어도 상관없다”고 썼다. “지성과 고매한 감성이 언제나 깨어 있는 남자라면 거적을 걸쳐도 존경받고 사람들이 그 옷차림을 따라 한다.”

에머슨은 “옷은 용기가 부족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가 의지하는 목발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일상의 끝없는 시련을 견디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근심을 잠재우기 위해 좋은 옷으로 자신감을 높일 필요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난 용기가 부족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다. 거적을 걸치고 다니기보다는 솜씨 좋은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는 걸 좋아한다. 운 좋게도 난 테리 헤이스트 같은 훌륭한 맞춤양복 전문가를 만났다.

훌륭한 맞춤양복 전문가는 솜씨 좋은 장인인 동시에 고객의 심리를 읽을 줄 안다. 헤이스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프로이트나 융 같은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꿰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고객이 바라는 옷과 그들의 몸에 어울리는 옷이 사뭇 다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안다. 고객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옷을 입히는 게 그의 일이다. “옷 자체가 얼마나 멋진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헤이스트는 말했다. “고객이 원하는 옷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소용없다.”

헤이스트는 15세 때 영국 런던의 맞춤양복점 거리 새빌로우에 있는 ‘앤더슨 & 셰퍼드’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빌로우는 에드워드 왕조 시대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헤이스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양복점 주인은 내가 재단사가 되면 중산모자를 쓰고 출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오래 전 얘기인지 실감나지 않나?”

헤이스트는 새빌로우의 또 다른 양복점 ‘헌츠맨’에서 근무하던 시절 언론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양복점은 그에게 연설 수업을 들을 것을 권했다. 어쨌든 그는 중산모자를 쓰거나 연극 배우처럼 말하지 않고도 그 시절을 잘 넘겼다. 헤이스트는 헌츠맨 이후 ‘호스 & 커티스’와 ‘사보이 테일러스 길드’를 거쳐 ‘토미 너터’에 정착했다. 믹 재거와 엘튼 존, 조지 해리슨, 잭 니콜슨[영화 배트맨(1989)의 조커 역을 할 때 헤이스트가 만든 의상을 입었다] 등의 스타들이 그의 고객이었다.

난 1992년 영국 디자이너 제레미 해켓의 소개로 헤이스트를 알게 됐다. 해켓은 런던에 맞춤양복 매장을 열기 위해 그를 고용했다. 헤이스트의 솜씨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는 거의 20년 전 해켓을 떠났지만 그 시절 고객 대다수가 그 후로도 줄곧 헤이스트에게 옷을 맞춰 입고 있다. 굿우드 자동차 축제 창설자인 찰스 고든-레녹스가 그중 한 명이다.

헤이스트는 그 후 자신의 양복점을 차려 운영하다가 몇 년 전 존 켄트, 스티븐 래크터와 손잡고 맞춤양복과 셔츠 전문점 ‘켄트 헤이스트 & 래크터’를 설립했다. 에든버러 공작(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이 이곳의 고객이다.

최고의 맞춤양복을 원한다면 재단사와 고객 사이에 돈독한 관계가 형성될 때까지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훌륭한 맞춤양복 고객이 되려면 거의 재단사만큼 경험이 있어야 한다. 첫 작품은 시간이 꽤 걸리기 마련이다. 재단사와 고객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돼야 하기 때문이다.

헤이스트를 거의 25년 동안 알고 지내다 보니 내가 뭘 원하는지 그가 텔레파시로 아는 것 같은 느낌을 가끔 받는다. 그는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안다. 그가 만들어준 옷 중엔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게 많다. 새발 격자무늬가 들어간 핑크색 트위드 스포츠 재킷이나 컨트리 웨스턴 스타일의 초록색 재킷 등이다.

헤이스트의 고객 대다수가 그 특유의 스타일을 수용한다. 가슴 부분은 날씬하게 만들고 몸의 곡선을 살리며 어깨를 강조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헤이스트는 노련한 배우처럼 어떤 캐릭터든 자신 있게 소화한다. 옷에 갇힌 듯한 느낌이 싫어 주름이 많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 같은 부류부터 요즘 영국 TV 진행자처럼 몸에 딱 붙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고객의 취향을 충실히 반영한다.

기술적인 측면은 둘째치고 많은 고객이 헤이스트의 가식 없는 태도를 높이 산다. 그는 잘난 체하거나 장삿속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전문가의 식견과 스스럼없는 태도로 고객에게 다가간다. 런던 도심의 색빌 거리에 있는 그의 양복점은 그가 만든 옷처럼 자연스럽다.

난 세심한 옷차림이 타인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만약 에머슨이 헤이스트처럼 재능 있는 전문가가 만든 양복을 입어봤다면 옷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 니컬러스 포크스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