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으로 태어나 인도의 별이 된 화가

인도의 진보파 미술가 그룹 주도한 라자 별세… 프랑스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을 만난 이후 기하학적 패턴으로 화풍 바꿔

1
라자의 1983년 작품 ‘사우라시트라’는 2010년 6월 인도 작품으로는 사상 최고가인 350만 달러에 팔렸다

인도의 위대한 현대 미술가 시예드 하이더 라자가 지난 7월 23일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인도 뭄바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진보파 미술가 그룹’(이 그룹이 현재 인도의 고급 미술 시장을 지배한다)의 주요 멤버였다. 라자의 사망으로 인도 독립 이후 미술사의 한 장이 막을 내렸다.

V S 가이톤데, F N 수자, 티예브 메타, M F 후사인 등 이 그룹의 다른 유명한 멤머들은 지난 15년 동안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들 대다수가 그랬듯이 라자도 사망하기 직전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정사각형과 삼각형, 원을 이용한 밝은 색상의 작품들이 잘 알려졌다.

2010년 6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라자의 1983년 작품 ‘사우라시트라(Saurashtra)’(200㎝x200㎝, 캔버스에 아크릴)가 인도 작품으로는 사상 최고가인 350만 달러에 팔렸다. 인도 뉴델리에서 미술관을 운영하는 수집가 키란 나다르가 전시 목적으로 사들였다. 2014년에는 1973년 작품 ‘라 테르(La Terre)’가 인도 델리의 사프론아트 경매에서 180만 달러에 팔렸다.

그는 ‘빈두(bindu, 산스크리트어로 ‘점’을 의미한다)’를 자주 사용한 화가로 알려졌다. 빈두는 힌두교의 탄트라 사상에서 우주적 힘을 나타낸다. 힌두교 여성 신도들이 이마에 찍는 점 ‘빈디’도 여기서 유래했다.

라자는 언젠가 어린 시절 일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가 아홉 살 때 스승이 흰 벽에 점 하나를 그린 다음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내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 점은 내 안에 잠자던 에너지를 흔들어 깨웠다. 그것은 에너지의 원천이자 고요한 중심이다. 모든 것이 그 점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지난 1월 델리의 바데라 갤러리에서 열린 라자의 전시회(그의 생전 마지막 전시회가 됐다)는 놀라웠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20여 점의 작품 모두가 지난해 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척한 모습에 휠체어를 타고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 그에게 “매일 그림을 그리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매일 그린다”고 대답했다.

2
라자는 빈두(점)를 자주 사용했다. 빈두는 힌두교의 탄트라 사상에서 우주적 힘을 나타낸다.

라자의 친구 아쇼크 바지파이에게 부탁해 그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았지만 그가 아파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조수와 제자들이 유명 미술가의 작업을 도왔듯이 2명의 미술가 조수가 라자의 작업을 거들었다고 알려졌다.

조수들은 라자가 원하는 형태를 그리고 그가 원하는 색의 물감을 고를 수 있도록 팔레트를 들고 있었다. 또 커다란 캔버스를 높이 들어올리거나 낮게 내려 그의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이전에 비해 섬세함이 떨어지긴 했지만 인상적인 색채와 일관성 있는 주제의 표현은 여전했다.

그 전시회에서 진보파 미술가 그룹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1명인 크리셴 카나(91)가 라자 옆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라자는 이질적인 색채의 배열들을 한 캔버스 안에 자연스럽게 짜 넣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저 그림 안에서 강렬한 빨간색이 다른 색채들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라자와 카나는 1950년대부터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2013년 바데라 갤러리와 라자 재단이 그 편지들을 엮어 출판했다.

“그것들을 그냥 찢어버릴 수는 없었다”고 카나가 말했다. 그 편지에는 그들이 젊은 시절 겪었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도 미술 붐이 일면서 진보파 미술가들의 작품이 경매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후론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은 굉장히 외롭다”고 카나가 말했다. “진보파 미술가들이 한 명씩 저 세상으로 갔다. 이제 아라, 라자, 가이톤데, 디예브가 모두 가고 없다. 현재 나 말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아크바르 파담시와 람 쿠마르뿐이다. 나이를 먹으면 죽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8년 전 인도 미술 붐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서 모험적인 인도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은 인기가 떨어졌다. 하지만 라자와 수자, 메타, 가이톤데 등 진보파 미술가들의 작품은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그들의 구상화와 추상화는 기록적인 작품가를 계속 갈아치웠다. 하지만 라자를 비롯한 몇몇 화가의 작품은 가끔씩 모조품이 갤러리와 경매 현장에 등장해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진보파는 초창기에 인도 미술의 전통에 도전장을 내밀고 유럽과 미국에서 본 미술 양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외세’로 분류돼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후사인이 2009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평단은 우리가 전통을 깨고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대신 벵갈파와 같은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라자는 1922년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시 주 만들라 지방의 오지 마을에서 산림감시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가장 가까운 대도시 나그푸르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엔 뭄바이로 자리를 옮겨 24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다.

26세 때인 1948년 유명한 프랑스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을 만난 이후 미술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라자가 카르티에-브레송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자 그는 구도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라자는 2006년 인디아 투데이와 가진 인터뷰에서 기하학적 패턴으로 방향을 전환한 데 대해 “만약 카르티에-브레송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부활을 상징하는 흰 십자가와 처형을 상징하는 검은 십자가를 계속 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자는 1950년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라자는 세잔과 모네, 고갱 같은 화가들에게 매료됐다. 그는 유럽에서 약 60년 동안 살다가 2010년에야 인도로 돌아갔다. 그즈음 라자는 인도가 자랑하는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소셜미디어에 넘쳐나는 애도의 글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 존 엘리엇

[ 필자는 인도 전문가로 ‘내파: 인도와 현실의 밀회(Implosion: India’s Tryst With Reality)’의 저자다.]

[박스기사] 다시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 – 영국 피츠윌리엄 박물관의 새 전시회에서 16세기 채색 필사본의 삽화에 덧칠해졌던 옷 벗겨내
3
박물관 측은 복잡한 디지털 이미징 기술을 이용해 아담과 이브의 몸을 가렸던 덧칠을 제거했다. 사진은 제거 이전의 모습이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피츠윌리엄 박물관에서 열리는 채색 필사본 전시회[Colour: The Art & Science of Illuminated Manuscripts(12월 30일까지)] 작품 중 중세시대의 삽화 필사본에 그려진 아담과 이브가 다시 원래대로 옷을 벗었다. ‘프랑스의 클로드를 위한 독본’이라는 제목의 이 16세기 필사본을 초창기에 소유했던 한 귀족은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후 수세기 동안 아담의 허리엔 나뭇잎 스커트가 걸쳐졌고 이브의 몸은 베일로 가려졌다.

피츠윌리엄 박물관의 큐레이터 스텔라 파나요토바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의 그림에 옷을 덧칠한 이전 소유주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조악한 덧칠로 그림을 망쳐놨다. 심지어 그 작업을 화가에게 의뢰하지도 않았다. 성서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상한 척하며 저지른 일이다.”

박물관 측은 케임브리지대학 응용수학과와 이론물리학과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디지털 이미징 기술을 이용해 삽화를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적외선 투시로 덧칠 부위를 확인한 뒤 수학적 모델링을 이용해 디지털 방식으로 그 부분을 제거했다. 필사본이 500년이나 된 것이다 보니 미술관 측은 이 작업이 행여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손상시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 삽화에 덧칠이 돼 있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고 파나요토바는 말했다. “그림에서 나중에 덧칠된 부분을 제거하는 일이 흔한 미술 분야와 달리 고문서 쪽은 보존 상태가 좋은 원본에 손을 대지 않는 게 관례다.” 하지만 박물관 측은 원본을 손상시키지 않고 완벽한 복원에 성공했다. “모든 과정이 알고리즘으로 구현됐기 때문에 장갑 낀 손으로 원본을 만질 필요도 없었다”고 파나요토바는 덧붙였다.

성서의 창세기와 관련된 기도와 이미지를 담은 이 필사본은 1505년 브르타뉴의 안느 왕비(루이 12세 프랑스 국왕의 부인)가 다섯 살짜리 딸 클로드를 위해 제작을 명했다. 1808년 미술품과 책, 필사본 수집가였던 피츠윌리엄 자작이 영국으로 가져갔다. 피츠윌리엄은 1816년 세상을 떠나면서 이 독본을 비롯한 귀중한 유물들과 ‘훌륭한 박물관’을 지을 큰돈을 남겼다.

올해로 개관 200주년을 맞은 피츠윌리엄 박물관은 이번 전시회에서 이 독본을 비롯한 150점의 소중한 유물을 전시한다.

– 엘리자베스 펄먼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