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의 ‘퀸메이커’

최측근 여성들은 그녀를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모금을 하지만 더 많은 여성의 공직 선출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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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이 조각된 사우스다코타 주의 ‘러시모어’를 찾은 힐러리. 그녀는 이곳에서 대통령의 꿈을 키웠을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자선활동가 수지 톰킨스 부엘은 1990년대 초 베이 에어리어에서 개최된 빌 클린턴 정치모금 행사에 참여했던 때를 기억한다. 힐러리 클린턴과 처음으로 같은 공간에 있게 된 순간이었다. 남편 빌을 소개하는 힐러리의 연설에 부엘은 매료됐다. “’힐러리는 언젠가 대통령에 출마해야 돼’라고 생각했다”고 패션 브랜드 ‘에스프리’ 설립자인 부엘은 말했다. “빌한테 관심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보다 힐러리한테 너무 끌렸다. 그녀의 헌신을 느낄 수 있었다.”

진보적 정치운동 및 후보를 후원하는 또 다른 자선가 스와니 헌트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1992년 10월 헌트는 덴버에서 빌 클린턴 대선운동을 위한 100만 달러 모금 행사를 주최했다. 힐러리는 행사 연사 중 한 명으로 나섰다. “힐러리가 경제에 관해 연설하는 걸 들었다. 그런데 미리 적어둔 쪽지 하나 없이 많은 사람 앞에서 세계은행이나 연준위 의장처럼 말하고 있었다. 행사 후 힐러리가 전화로 감사를 표하자 헌트는 “‘사실 빌한테 준 돈이 아니에요. 당신한테 드린 겁니다’라고 답했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뉴욕 주 민주당 의장이었던 주디스 호프는 1996년 맨해튼 여성 리더 오찬에서 힐러리의 힘을 처음 깨달았다. “방 안에 있는 여성을 둘러봤다. 힐러리가 명석한 두뇌와 유머감각으로 좌중을 사로잡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걸 갖췄다. 그래서 ‘이 여자라면 정말 훌륭한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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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 행사에 함께한 힐러리 클린턴과 패션 브랜드 ‘에스프리’ 설립자 수지 톰킨스 부엘(오른쪽).

부엘과 헌트는 힐러리의 최대 후원자가 됐다. 호프는 힐러리의 첫 선거운동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상원 선거운동을 시작하고 조직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줬다. 셋은 힐러리와 비슷한 나이대 여성으로 이뤄진 최정예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힐러리와 함께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고,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마티니를 들이키고, 함께 울고 웃었다. 이들은 힐러리가 친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시를 이메일로 받았고, 자신의 아이디어나 의견을 힐러리가 자세히 기억하는 것에 감명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힐러리를 백악관에 보내기 위해 수년의 시간을 기다리고 계획하고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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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성 관련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찾은 퍼스트레이디 힐러리를 맞이하는 당시 주 오스트리아 미국 대사 스와니 헌트(오른쪽).

진정한 자매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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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된 힐러리.

지난 40년간 힐러리 주변에는 충성스런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정치 프로들이고 대부분 그녀보다 나이가 조금 어리다. 다들 똑똑하고 흑인과 혼혈, 라틴계, 무슬림, 유대인 등 인종이나 민족도 매우 다양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최측근 정치 프로 중에는 홍보 전문가 맨드 그룬왈드, 변호사 셰릴 밀스, 퍼스트레이디 시절 힐러리의 참모총장이었던 매기 윌리엄스, 부관이었던 휴마 애버딘 등이 있다.

힐러리의 옷차림이나 메시지 등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수정하는 수많은 전략가와 여론 분석가 외에도 힐러리에게 자문(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돈)하는 최측근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힐러리를 숭배하고 그녀가 미국 정계의 윤리적 선(善)을 상징한다고 믿으며 여성 대통령을 간절히 원한다. “살아 생전 ‘여자 대통령’을 볼 일이 없다고 믿었던 세대”라고 루트거대학 전미여성정치센터의 데비 월시 의장은 말했다.

힐러리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1960년대에 성인이 됐다. 이들의 졸업·웨딩 앨범에서 당시 유행하던 나팔바지와 긴 머리, 할머니 안경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웰즐리대학 시절 힐러리가 훌륭히 소화했던 패션이다. 몇 장 더 앞으로 넘기면 어깨뽕을 넣은 정장이 나오고 로펌이나 기업 사무실에서 유일한 여성이 된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여성을 사회인보다 주부로 보던 1980년 이전에 사회로 진출했다. 이들이 참여했던 사회혁명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봇물을 이뤘고 결국 여성은 미국 근로자의 약 50%를 차지하게 됐다.

자수성가한 여성, 거액의 유산을 상속 받은 여성, 남편이 부자인 여성 모두가 힐러리를 돕기 위해 거액의 수표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정치자금 후원은 남성의 영역이었다. 힐러리의 최고 여성 후원자들은 힐러리 대선운동본부 슈퍼팩(Super PAC, 무제한의 정치자금 기부)에서 남성이 대다수를 차지한 후원자 상위 150명 순위에도 이름을 올린다.

이들이 남자였다면 분명 ‘킹메이커’로 불렸을 것이다. 호텔 로비 바로 기자를 불러내 위스키를 건네면서 보도내용을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허브티(와 때로는 마티니)를 마시며 ‘우리의 여정’이나 ‘빛의 여신’ 같은 뉴에이지 느낌이 나는 단어로 대화를 나누는 ‘퀸메이커’다.
“우리는 힐러리 날개 밑에 부는 바람”이라고 부엘은 말했다. “힐러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힐러리도 그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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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호프(아래 왼쪽)는 힐러리의 첫 선거운동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상원의원 선거운동뿐만 아니라 2008년 대선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위). 이를 바탕으로 힐러리는 올해 또 다시 대권에 도전한다.

‘섹스앤더시티’와 사뭇 다른 힐러리의 뉴욕 일기

힐러리는 1991년부터 전국적 유명인사였지만 정치 인생은 1999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녀를 지지하던 여성들은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 섹스 스캔들로 수치심에 휩싸여 있던 힐러리의 원대한 야망을 돕고자 그녀의 상원의원 선거를 도왔다. 상원의원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힐러리는 여성이 지원하고 주도하는 첫 주요선거를 이끌었다.

1996년 힐러리를 만난 호프는 힐러리가 뉴욕으로 가서 뉴욕 주 상원직에 도전하길 희망했다. 호프는 ‘첫 여성’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뉴욕 주 이스트 햄튼의 첫 여성 도시감독관으로 선출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뉴욕 주 민주당의 첫 여성 의장이 됐다. 그녀는 힐러리가 뉴욕 주 첫 여성 상원의원으로 당선되길 바랐다.

힐러리는 50대에 뉴욕에 도착했다. 그녀를 잠 못 들게 하는 대화는 예쁜 구두가 아니라 내각 관료와 의원에 관한 것이었다. 힐러리는 국제적으로 유명했고, 아카소와 워싱턴 DC에서 성년의 삶을 보낸 영리한 정책 전문가였다. 백악관 이스트윙에서 8년을 살며 의료보험 개혁 실패에 대한 공격이나 헤어스타일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리기도 했다.

뉴욕 여성이 보기에 힐러리는 아칸소 주 리틀록 특유의 남부 억양을 쓰면서 자신이라면 벌써 오래 전에 쫓아냈을 남자 옆을 충실히 지키는 고루한 여성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호프는 힐러리가 뉴욕 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권자 말을 듣는 ‘경청 투어’에 처음 나섰을 때 힐러리와 함께하며 고무적인 느낌을 받았다. 뉴욕 주 북부 여성들은 퍼스트레이디 힐러리를 보기 위해 마을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뉴욕시 근교나 도심에 사는 여성들은 심드렁했다. “반발심이 있는 걸 보고 놀랐다”고 호프는 말했다. “그들은 힐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자기들도 몰랐다.”

뉴욕시에서 힐러리를 열렬히 따르는 추종자들과 호프는 여성 유권자를 위한 모임을 아파트나 타운하우스에서 개최했다. 그리고 힐러리에 대한 이들의 질문과 우려에 답해 줬다. “내가 아는 힐러리는 이런 여성”이라고 말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우리 남편 장례식에 폭우를 뚫고 직접 운전해서 온 일, 아이가 아팠을 때 힐러리가 많은 도움을 줬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힐러리는 살면서 친구와 낯선 사람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그녀는 그런 면을 절대 떠벌리지 않는다.”

독지가 질 이스콜 또한 자신의 거실로 사람들을 초대해 독서모임과 비슷한 정치 토론회를 열었고 이웃에게 메시지를 전파했다. “정말 힘들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는 여성들은 대화를 시작하면 좋지 않은 소문만 늘어놓았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사는 똑똑한 여성, 충분한 정보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잘못된 정보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해냈다.”

이스콜은 1990년대 초반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마사스 바인야드 섬에서 클린턴 일가를 만났다. 그리고 민주당 전국위원회 앞으로 “아주 고액의” 수표를 내며 그녀가 “여정”이라 칭하는 정치후원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의 정치후원 활동을 보기 힘들었던 1994년의 일이다. 이후 이스콜과 남편은 수백만 달러를 더 후원했다. 이스콜은 자신이 처음부터 힐러리에게 “매료됐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힐러리가 성취한 일이 내게 큰 영감을 주고 힘을 불어넣어 줬다.”

거실에서 열렸던 모임은 성과를 거뒀다. 2000년 상원선거 출구조사에서 여성 유권자의 60%가 힐러리를 뽑았다고 답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선거운동하는 동안 힐러리는 백인 여성과 교외에 거주하는 중산층 여성 사이에서 지지율이 낮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소식이기도 했다.

정계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은 여성 후보를 위해 여성 정치꾼들이 여성 유권자를 대상으로 선거 운동을 펼칠 기회를 지난 수년 간 기다려왔다. “수평적인 조직이었다. 어떤 수직적 위계구조도 없었다”고 힐러리의 상원 선거운동 본부에서 선임 자문으로 일했던 앤 루이스는 말했다. “직함도 없었다. 다른 선거운동 본부와 다른 점이었다. 의사소통을 위해 의견이 활발히 오가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네 생각은 어때?’ 같은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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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웰즐리대학 시절의 힐러리. 1992년 남편 빌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섰을 당시 힐러리의 고등학교를 함께 찾았다.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클린턴 부부.

여성의 정치 후원

상원 선거와 마찬가지로 대선운동에서도 돈은 필요했고 힐러리는 필요한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지난 20년간 힐러리가 모집한 정치자금은 중간 크기의 아프리카 국가 예산을 수년 간 책임지고도 남는 금액이다. 남성 후원자의 기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2016년 선거운동은 여성의 정치자금 후원에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책임정치센터(CRP)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기준으로 힐러리가 모집한 선거 자금에서 여성 후원자의 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근래 역사상 어떤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보다 많고 올해 힐러리가 모집한 여성의 정치 후원금은 다른 어떤 후보보다 많다.

힐러리를 후원하는 여성 기부자의 돈은 하임 사반, 셸든 아델슨, 코크 형제처럼 ‘큰손’ 남성 후원자의 엄청난 자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여성 후원자와 이들 파워 남성 후원자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이들이 오로지 한 이슈에만 집중한다. 이 경우 여성 후원자의 목적은 ‘더 많은 여성의 공직 선출’이다.

보스턴의 독지가 바바라 리는 올해만 클린턴 대선 본부에 110만 달러를 기부하며 여성 후원자 중 3위에 등극했다.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선거 출마를 고려하고 있을 때부터 리는 여성의 공직 선출을 위한 ‘백악관 프로젝트’에 엄청난 돈을 후원한다. 그녀는 클린턴에게 상원 출마를 강력히 권고했고 이후 힐러리가 선거운동할 때마다 자금을 후원했다.

여성 후원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건 뉴욕에서였다. 호프와 루이스를 비롯한 초기 힐러리 지지자들은 맨해튼이나 웨스트체스터 곳곳을 돌아다니며 거실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정치자금을 후원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뉴욕 부유층 여성의 마음을 천천히 얻어내기 시작했다. “여성이 독자적으로 5만 달러 수표를 쓰는 일이 드물던 때였다”고 힐러리를 위한 정치자금 모집운동 ‘레디포힐러리’ 전국재정위원회 공동의장을 역임하는 이스콜이 말했다. 디자이너 리사 페리나 예술품 수집가 앤 테넨바움 등 초기 힐러리 후원자 중에는 월스트리트 백만장자를 남편으로 둔 여성도 있었다. 은퇴한 주식 중개인 마고 알렉산더(1970년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생 800명 중 24명밖에 되지 않았던 여성 중 1명)처럼 자수성가한 여성도 있었다. 페리와 알렉산더는 이스콜처럼 힐러리 최측근으로 합류해 힐러리를 위한 최대 규모의 모금행사를 주최했다. 이들의 목적은 당연히 힐러리와 여성의 공직 진출이었다.

“1998년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을 때 상원에서 남성 의원이 91명, 여성 의원은 9명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페리는 말했다. 그해 힐러리를 만났을 때 페리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했다.

1985년 여성 정치인을 위한 여성 정치모금단체 ‘에밀리 리스트’를 창설한 정치운동가 엘런 말콤은 힐러리의 대선후보 지명이야말로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이 정점을 이룬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선거가 지날 때마다 여성은 자선 빵 판매 행사에서 역사적 순간을 만들며 진화를 거듭했다. 여성 유권자로부터 후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 다수가 생애 처음으로 정치후원을 위한 수표를 썼다. 처음이 가장 힘들다. 후원금을 한 번 기부한 사람은 계속 후원금을 낼 가능성이 크다.”

LA 타임스에 따르면 부엘은 클린턴 부부와 그들의 정치운동을 위해 지금까지 1500만 달러를 후원했다. 힐러리가 당선된 후 공직을 바라지는 않지만 당선될 경우 힐러리가 많은 여성 인재를 기용할 것으로 믿는다. 이 또한 부엘에게는 큰 성과다. “보여주기 식으로 백악관 집무실을 여성으로 가득 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힐러리는 훌륭한 여성들을 알고 있다. 여성 적임자를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는 뻔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실제로 힐러리는 그렇게 한다. 나도 사업할 때는 될 수 있으면 여성과 함께 일하려 한다.”

우리가 뒤에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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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와 그녀의 ‘퀸메이커’들은 여성의 권익을 위해 싸운 첫 세대다. 하지만 요즘 젊은 여성들은 그들을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필라델피아 민주당 전당대회가 일주일이 지난 후 힐러리의 가장 오래 되고 친한 친구 4명이 모였다. 일리노이 주 파크 리지에 있는 고등학교를 1965년 힐러리와 함께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이들은 시카고 도심에 있는 페트로 레스토랑에서 기자와 점심 인터뷰를 가지는데 동의했다. 모임의 리더격인 벳시 에벨링은 일리노이 주정부에서 성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해 일했고, 다른 사람보다 정치에 활발히 참여했다. 일리노이 대표로 전당대회에 참석한 그녀는 일리노이 주가 어떤 후보를 선택하기로 했는지 발표하는 역할을 맡아 어린 시절 친구인 힐러리의 대선후보 지명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점심에 참석한 다른 고등학교 친구 중에는 캐시 버지스가 있다. 항공사 승무원이었던 그녀는 아동후원금모집 담당관으로 일한다. 예술가이자 보석 디자이너 보니 클레르, 사업가 앤 드레이크도 있다. 모두 70대 여성들이다. 아이젠하워 시대 백인이 대다수인 시카고 교외에서 자란 이들은 어린 시절 서로의 집을 틈만 나면 드나들면서 그들 가족들과 친해지고 졸업파티 파트너를 놀리면서 자라났다.

이들은 지난 수년 간 인디애나 외딴 시골에 있는 친구 중 한 명의 통나무집에 모여 ‘여자들만의 주말 밤’을 보냈다. 이들은 선거일에 오래 된 친구와 뉴욕시에서 만나자는 계획도 세웠다. ‘힐(힐러리 애칭)’과 만날 때 이들은 정치보다는 사소한 이야기를 한다.

힐러리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파크 리지 동창들은 사적인 만남을 통해 힐러리에게 고향 소식과 함께 웃을 만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국무부가 당시 국무부 장관이었던 클린턴의 공무 및 사적 이메일 수만여 통을 폐기 처분했을 때 보수 사법 감시단체의 소송을 통해 입수한 내역을 보면 에벨링과의 서신이 수십 통 포함됐다. 에벨링은 힐러리와 자주 가벼운 대화를 주고 받았다. 농담을 보내거나 지역 소식을 전하거나 2013년 1월 메일처럼 “머리, 보석, 온화한 표정 아주 좋아. 편안해 보여”라고 스타일에 대한 칭찬을 해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친구나 지인이 보내는 다른 많은 이메일과 달리 에벨링의 메일에는 민원이나 사진을 함께 찍자거나 그 밖의 다른 요구사항을 담고 있지 않았다. 힐러리도 친구에게 흉금을 터놓는 메일을 보냈다. 이스라엘의 하시디즘 유대교에서 2011년 신문에 났던 사진에서 힐러리의 모습을 지워버리자 힐러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이라는 제목으로 에벨링에게 분노를 토로하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1960년대 성년이 된 이들은 학생 자치회나 학교 댄스파티를 위해 체육관을 꾸미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모범생이었다. 숙제를 제때 하고 좋은 성적을 받았던 학생들이다. 힐러리는 가장 반듯한 학생으로 두각을 드러냈다고 친구들은 기억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힐’이 대선에 나올 줄 아무도 몰랐다고 친구들은 말했다. 여학생은 큰 꿈을 말할 기회도 없었다. 구인광고에서도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별도로 구분됐을 때였고 여성에게 ‘맞는’ 일자리는 제한됐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바로 간호학교로 보내버리던 때였다”고 에벨링은 말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가부장제를 전복시킬 계획을 함께 모의한 건 아니다. 결혼은 기정사실이었고 ‘결혼 후 일을 할 수도 있다’고 막연히 생각할 때였다. 그러나 1980년 대가 되자 아칸소 주지사의 아내(이자 변호사)가 된 친구는 미국의 많은 이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큰 의미를 던졌다. 힐러리는 많은 방식에서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사랑’을 논하자

친한 친구들에게 올여름 힐러리의 민주당 대선후보 공식 지명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필라델피아에 모인 친구들은 눈물을 닦으며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클리브랜드에서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힐러리가 진심으로 믿는 가치이기도 하다. 올해 상반기에 힐러리는 버즈피드의 젊은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정치 테마를 “사랑과 친절”로 요약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초반에 “의미 있는 정치” 등을 거론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 비난을 받은 후 “그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사적으로 특히 여성들과 함께 있을 때면 사랑과 친절의 정치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을 여자친구들과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런 대화를 많이 하고 좋은 문구가 있으면 서로 공유한다. 우리한테는 늘 있는 일이다. 누군가의 죽음, 이혼, 질병, 그리고 손주와 같은 인생의 회로애락도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다. 공적으로는 자주 거론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보면 되겠다”고 힐러리는 버즈피드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자매간 사랑의 도시’가 된 필라델피아에서 힐러리와 책을 교환하고 “그런 대화”를 많이 했던 친구들은 다시 만났다. 메리 올리버처럼 힐러리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편지나 이메일로 받아 본 친구들도 있다. 부엘은 힐러리가 전당대회 테마를 “지휘했다”고 믿는다. “힐러리는 사랑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 한다”고 부엘은 말했다. “사랑을 사람들에게 확실히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한 친구들은 힐러리가 정말로 ‘사랑과 친절’에 헌신한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벵가지와 이메일 스캔들, 이라크 전쟁 투표, 골드만삭스 연설, 때때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입장처럼 이와 반대되는 정보는 미화하거나 무시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힐러리는 여성과 아동,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헌신적인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친구의 엄마나 아이가 아플 때 이를 절대 잊지 않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빠지지 않고 와주며 파티에 초대해 주는 ‘최고의 친구’다.

이들 ‘퀸메이커’는 왜 젊은 여성들이 힐러리에게 이런 열정을 느끼지 않는지 의아해 한다. 이들 눈에 힐러리는 14세의 ‘힐’이고 보다 최근에 만난 친구들 눈에는 뉴욕에서 온 여전사이자 여성과 아이를 위해 싸우는 투사, 여권과 인권을 연결시킨 세계적 페미니스트다. 수십 년간 세계적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으면서 5000만 달러의 재산을 남편과 함께 축적한 여성으로는 보지 않는다.

젊은 여성들이 힐러리를 혁명가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들은 당황한다. 친구들 입장에서 힐러리는 억압과 굴욕의 시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여성을 이끈 투사지만 이미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많은 시절에 대학을 다니고 남성과 나란히 일하는데 익숙하고 낙태를 원하면 당연히 받을 수 있고 여성이 대선에 나서는 게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 힐러리는 그저 부유한 기성 백인 세대 중 한 명일 뿐이다. 힐러리의 여성 참모진은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믿으며 이번 선거는 ‘페미니즘의 제2 물결’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대선운동 중인 힐러리가 바지 정장을 입은 그저 그런 할머니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들 눈에 힐러리는 웰즐리 대학에서 열정적으로 기성세대와 싸워나가던 투사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격을 퍼부을 때마다 힐러리의 지지율이 올라가지만 힐러리의 측근들은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선거일까지 3개월 동안 온갖 추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다. 이들이 말하는대로 “5000년간 이어진 가부장제를 싸움 하나 없이 전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 고 니나 벌레이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