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연출하는 미니멀리즘의 대가

벨기에 연출가 이보 반 호프, 데이비드 보위의 뮤지컬 ‘라자루스’ 오는 10월 런던에서 다시 무대에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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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쿠페러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 ‘지나가는 것들’에서는 죽음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벨기에 출신 연출가 이보 반 호프(57)가 죽음에 처음 눈뜬 건 여덟 살 때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디즈니 만화영화 ‘밤비’를 보여주려고 벨기에 시골 마을에서 1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앤트워프의 극장까지 데려갔다. 스크린에서 밤비의 엄마가 사냥꾼 손에 죽었을 때 반 호프의 진로는 결정됐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울었다. 그때 예술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최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극장의 한 회의실에서 만난 반 호프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반 호프는 그때 자신이 예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연극 연출가 중 한 명이다. 1987년 연출한 프랑크 베데킨트 원작의 오페라 ‘룰루’가 벨기에 라디오에서 ‘올해의 작품’으로 선정된 이후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주류 무대에서 자리를 확실히 굳혔다.

반 호프가 2014년 연출한 아서 밀러의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런던 영 빅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웨스트엔드로 무대를 옮겼고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했다. 이 미니멀리즘적인 연극은 토니상 2개 부문(연출상 포함)에서 수상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뉴욕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뮤지컬 ‘라자루스’를 초연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는 밀러의 또 다른 작품 ‘시련’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반 호프의 예술적 고향은 암스테르담이다. 그는 그곳에서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극단 ‘토닐그룹’을 이끈다. 지난 8월 어느 무더운 오후 그 극단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잘생긴 얼굴과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는 아주 침착했다. 말투는 부드러우면서도 빨랐다. 흰색과 푸른색 줄무늬 셔츠에 진바지를 입었지만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9월 16일 독일 루르트리엔날레(3년마다 열리는 국제 공연예술 축제) 무대에 올릴 ‘지나가는 것들(The Things That Pass)’의 리허설 중이었다. 네덜란드 작가 루이 쿠페러스의 단편소설(1906년에 발표된 것치고는 포스트모던적인 경향이 매우 짙다)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그가 쿠페러스의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

“쿠페러스는 오스카 와일드나 마르셀 프루스트, 토머스 만에 견줄 만한 작가”라고 반 호프는 말했다. “쿠페러스가 영어나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데 능하다. 쿠페러스는 두려움과 가족, 죽음에 관해 썼다. 또 억압이 어떻게 파괴로 이어지는지, 죽음에 대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뤘다. 내가 연출하는 연극에서 죽음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는 죽음이 특히 부각된다. 과거에 연인 사이였던 2명의 노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죽음을 앞둔 그들은 60년 전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의 비밀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범죄의 진실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그들의 손자 2명은 한 핏줄인지도 모르고 결혼을 약속한다. 반 호프에게 토닐그룹 극단에서 늘 같은 배우들과 일하다가 나이 많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게 어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때로는 어린 소년에게서 노인이 보이기도 하고, 노인에게서 어린 소년이 보이기도 한다”고 그는 말했다. “난 연극을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본다. 무대에는 문이 없고 등장인물들은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에 갇힌다. 75세인 누군가가 20세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매우 연극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반 호프가 말하는 ‘연극적’이라는 표현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하자면 ‘미니멀리즘의 극치’다. 피상적인 것을 배제하고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핵심적인 진실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그가 연출한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무대장치와 소품을 거의 쓰지 않았다. 배우들은 아무것도 없는 정사각형의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 마지막 장면에선 등장인물들이 서로 뒤엉켜 천장에서 쏟아지는 피에 흠뻑 젖는다. 살아 숨쉬는 악의 상징이다.

요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어떤 재료에서 진국을 우려내려면 오랜 시간 끓여야 한다. 반 호프는 작품의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 몇 달 동안 텍스트를 분석하고 자신의 평생 파트너인 무대 디자이너 얀 베르스베이벨트와 함께 무대 이미지를 구상한다. “일례로 데이비드 보위는 내게 ‘라자루스’의 가사를 읽어준 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난 ‘모든 일이 주인공의 해골 안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단순한 이미지가 무대 배경이 됐다.”

반 호프는 그 무대 디자인을 자신의 랩톱 컴퓨터 스크린 세이버로 설정했다. 텅 빈 아파트에 붉은 조명이 켜져 있고 뒤쪽엔 정사각형 창문 2개가 있다. 그 창문들 사이에 길쭉한 비디오 스크린이 서 있다. 해골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것이 해골이란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반 호프가 말했다.

“난 리허설을 시작하면 확실한 방향감각을 갖고 중요한 대목을 놓치지 않는다. 또 받아들일 건 받아들인다. 오늘 리허설 때는 배우들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데 시간의 절반 정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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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호프는 “연극에서 배우는 뜨뜻미지근한 연기가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극단의 경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반 호프는 각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배우들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때로는 목소리가 커질 때도 있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로돌포 역을 맡았던 루크 노리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한 장면에서 그가 ‘더 강하게 쏟아내라. 그의 인생이 걸린 순간이다’며 몰아붙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난 비명을 지르면서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바로 그거다’라고 말했다.”

반 호프는 “그건 연극이 관객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뜨뜻미지근한 연기가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극단의 경지를 보여줘야 한다.”

반 호프는 이런 방식을 ‘텍스트의 X레이 촬영’이라고 부른다. 영국 극작가 사이먼 스티븐스는 이런 방식을 옹호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이 비유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하다. “X레이는 우리 몸을 보여주지만 그게 우리 자신인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쓴 연극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Song From Far Away)’에서는 한 남자가 죽은 형제에게 쓴 편지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극본에는 배우가 누구에게 그 편지를 읽어주는지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역할을 맡았던 네덜란드 배우는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때 반 호프가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빈 의자 하나를 놓아줬다.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추상적인 영역을 떠나 물리적인 공간에 모습을 나타낸 순간이다(‘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난 극본을 쓰면서도 그걸 못 봤는데 반 호프는 봤다”고 스티븐스는 말했다. “앉았던 사람이 사라진 빈 의자. 슬픔을 그보다 더 극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반 호프에게 죽음은 정서적 공감의 원천이다. “난 늘 죽음과 접해 왔다”고 그는 말했다.

반 호프는 16세 때 기숙학교에서 한 남학생을 사랑하게 됐다. “그 애도 날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애가 사라졌다”고 그는 말했다. 그 남학생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반 호프는 그 후 1년 동안 그 소년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상실감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때 우리는 늘 혼자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그 이야기를 들어줄 관객이 있다.

반 호프는 보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몇 달 동안 그와 공동작업을 하며 가까이 지냈다. 보위를 잃은 슬픔이 죽음을 대하는 그의 방식에 어떤 가르침을 줬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6~7개월에 불과했지만 생각보다 인상 깊었다”고 반 호프는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모든 작품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걸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잘 안다. 단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다.”

뮤지컬 ‘라자루스’는 오는 10월 런던에서 다시 막을 올린다. “그 자리에 보위가 있을 것”이라고 반 호프는 말했다. 한편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1942년 누아르 영화 ‘강박관념’을 연극으로 만든 작품(주드 로 주연)은 내년 4월 런던 바비컨 센터 무대에 오른다. 반 호프가 연출하는 연극에서 관객은 군더더기를 모두 벗겨낸 작품의 핵심을 볼 수 있다. 스티븐스의 말대로 ‘반 호프의 연출을 X레이 촬영에 비유하는 것은 비인간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정확한 표현이다. X레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사벨 로이드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