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벽화’의 운명은?

길거리 미술가 키스 헤어링이 30여 년 전 뉴욕 맨해튼의 건물 안에 그린 그림이 건물주의 재정난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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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링은 1984년경 뉴욕 108번가에 있는 그레이스 하우스의 유스 센터 청소년들을 위해 이 벽화를 그렸다.

미국의 길거리 미술가 키스 헤어링(1958~1990)은 그림을 빨리 그리는 연습을 했다. 그는 1980년대 초 뉴욕에서 전철 역마다 검은색 종이가 붙어 있는 빈 광고판을 찾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빈 광고판을 찾으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경찰이 없는지 살피고는 만화 같은 그림을 재빨리 그려 넣었다. 그러다가 체포된 적도 몇 번 있다.

어느 토요일 밤(1984년일 가능성이 크다) 헤어링은 뉴욕 108번가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현관 위에 작은 십자가가 걸린 그 건물은 이전에 수녀원으로 쓰던 곳으로 ‘그레이스 하우스’라고 불렸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안경을 낀 헤어링은 검은색 물감이 가득 든 커피 캔과 굵은 붓을 들고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가 그레이스 하우스 유스 센터 책임자 게리 맬런의 허락을 받고 헤어링에게 벽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건물을 소유한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헤어링은 계단 맨 아래쪽 벽에서 시작해 3층까지 올라가면서 그림을 그렸다. 걷고 달리고 뛰고 점프하고 포옹하는 인물들의 윤곽을 묘사했다. 각 인물의 팔 다리 주변에 안쪽으로 굽은 짧은 선을 반복적으로 그려 진동하는 듯한 느낌을 줘 그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날 밤 유스 센터에 모인 10대 청소년 수십 명은 헤어링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신기한 듯 지켜봤다.

“(벽화를 완성하는 데) 한 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고 맬런은 말했다. “정말 빨랐다…밑그림도 없었고 그림이 그의 내부로부터 그냥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계단 위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붓을 통해 벽 위에 바로 나타나는 듯했다.”

이 즉흥적인 그림은 3층 계단참에서 끝난다. 마지막 그림은 그곳에 난 문 쪽으로 다이빙하는 듯한 포즈의 인물로 하반신만 그려졌다. 이 건물이 수녀원이었을 때 그 문으로 나가면 수녀원장의 거처였지만 당시엔 맬런의 사택이었다. 맬런은 “헤어링이 ‘그건 당신이에요, 맬런’이라고 말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하루 종일 청소년들을 상대하며 고단한 일과를 끝낸 맬런이 사택으로 도망치는 모습이라는 설명이었다. 헤어링은 아래층 로비로 돌아가 빈 벽에 자신의 대표적인 이미지 ‘빛나는 아기(radiant baby)’를 그려 넣었다. 기어가는 아기의 윤곽이 햇살로 둘러싸인 그림이다.

그로부터 불과 6년 후 31세의 헤어링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는 세계 곳곳에서 100여 회의 단독, 또는 그룹 전시회를 열었다. 또 그레이스 존스, 오노 요코, 빌 T 존스 등의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을 했으며 여러 병원과 미술관에 벽화를 그렸다. 베를린 장벽에도 그림을 남겼다.

헤어링이 그레이스 하우스에 벽화를 그린 지 30년이 넘은 지금 재정난에 몰린 건물주(교회)는 세입자들을 내보내고 건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려 중이다.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헤어링의 미술 작품이 파괴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놓였다는 말이다.

이 벽화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베니 소토다. 사우스 브롱크스에 살던 가난한 소년 소토는 그레이스 하우스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자라면서 미술 작품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그는 클럽에 드나들면서 미술계 사람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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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하우스 벽화에는 헤어링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꼽히는 ‘빛나는 아기’도 그려졌다(왼쪽). / 그레이스 하우스 벽화가 끝나는 부분에 그려진 다이빙하는 듯한 포즈의 인물. 헤어링은 고단한 일과를 끝내고 사택으로 도망치듯 돌아가는 유스 센터 책임자(게리 맬런)를 묘사했다고 설명했다.

소토는 1980년대 초 뉴욕 소호의 유명한 디스코텍 ‘파라다이스 거라지’의 단골이 됐다. 그곳에서 그는 몸에서 광채가 나는 이상한 아기 그림이 그려진 핀과 T셔츠를 자주 봤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헤어링의 전시회가 열리는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 데려갔다. 헤어링이 길모퉁이 허름한 건물의 지하실을 ‘브레이크 댄스 디스코’로 개조한 곳이었다. 형광색 페인트를 칠한 벽에 검정색 조명을 비추고 DJ 설비를 갖춘 그곳에서는 매일 밤 파티가 열렸다. 소토는 그곳과 파라다이스 거라지에서 헤어링과 친해졌고 헤어링은 그를 스튜디오 조수로 채용했다.

소토는 헤어링이 그레이스 하우스에 벽화를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헤어링은 소토와 그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토는 헤어링에게 그곳의 청소년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어줄 것을 몇 차례 요청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청을 헤어링이 받아들였고 유스 센터 책임자인 맬런도 동의했다. 맬런은 교회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겨울 밤 헤어링은 물감이 든 커피 캔을 들고 그곳에 갔다. “헤어링은 정말 마음씨 좋은 청년이었다”고 맬런은 말했다(현재 맬런은 헌터대학 사회사업 대학원의 교수다). “그는 그림을 그린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소토는 그 벽화가 유스 센터의 모든 청소년에게 선물처럼 느껴졌던 것을 기억한다. 대다수가 가난한 집 아이들로 유스 센터는 그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벽화를 볼 때마다 거기 그려진 인물들의 활발한 움직임과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소토는 말했다. “헤어링은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그런 효과를 냈다. 그레이스 하우스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그곳에는 언제나 계단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소토는 헤어링의 스튜디오 조수로 18개월 동안 일했다. 미술 재료를 사들이고, 점심을 사 나르고, 그림을 배달하고, 캔버스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헤어링의 친구가 된 소토는 그의 절친들(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팝 스타 보이 조지와 마돈나 등)과 어울렸다. 마돈나는 1984년 헤어링의 생일 파티에서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Like a Virgin’을 불렀다(이 노래가 공식 발표되기 몇 개월 전이었다). 헤어링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프랑스 파리에서 작업할 때도 소토를 데려갔다. 소토는 헤어링의 조수로 일했던 것이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둔 뒤에도 헤어링은 늘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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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링은 1980년대 초 뉴욕에서 전철 역마다 검은색 종이가 붙어 있는 빈 광고판을 찾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뉴욕 공공장소에 그려진 헤어링의 유명한 벽화 ‘마약은 나빠(Crack Is Wack)’에 영감을 준 사람도 소토였다. 헤어링은 1986년 할렘 리버 드라이브의 버려진 핸드볼 코트 벽에 이 벽화를 그렸다. 존 그루언은 헤어링의 전기에서 당시 그가 했던 말을 인용했다. “이 벽화를 그리게 된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1984년 한 젊은이를 스튜디오 조수로 채용했다. 푸에르토리코계인 그 청년은 매우 똑똑한 의대 지망생이었다. 그는 가톨릭 커뮤니티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 아주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차츰 크랙(강력한 코카인의 일종)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그러나 똑똑한 그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했고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해 완치됐다.”

1980년대 말 소토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지 1년도 채 안 돼 헤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소토는 1990년 2월 헤어링이 사망하기 전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하기로 했던 참이라 헤어링은 셔츠를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소토는 헤어링의 등에 생긴 피부 발진을 봤다. 그게 뭔지 짐작이 갔지만 믿고 싶지 않아 헤어링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소토는 그때 헤어링이 짜증난 표정으로 “이러지 마 소토, 나 에이즈야”라고 말했다고 돌이켰다.

소토가 헤어링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활기차게 스튜디오 안을 돌아다니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거침없이 벽화를 그리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고 소토는 말했다. 그는 그날 헤어링의 스튜디오에서 나오면서 울었다. “정말 슬펐다. 그는 너무도 젊고 재능이 넘쳤다. 더 오래 살았다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레이스 하우스 건물은 지난 30년 동안 용도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벽화는 대체로 손상 없이 잘 보존됐다. 예수 승천 교회가 거의 1세기 동안 소유해 왔으며 1977년부터 2008~09년까지는 가톨릭 청소년 기구가 세내 유스 센터로 썼다. 그 후 이 건물에는 다양한 단체의 사무실이 들어섰고 2013년부터는 일부가 아파트로 임대됐다. 예술가와 학생, 교사 등 직업과 연령대가 가지각색인 사람들이 이곳에 살면서 욕실과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저예산 인디 영화계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버트 사비나는 영화 촬영 장소를 물색하다가 그레이스 하우스를 발견했다. “처음 그 벽화를 봤을 때부터 친근감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마침 살 곳을 찾고 있던 사비나는 그 건물 4층에 빈 방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이사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내 집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비나가 헤어링의 벽화와 함께 산 지도 2년이 넘었다. “그 그림은 언제나 내게 힘을 준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헤어링이 붓에 물감을 찍어 붓질을 새로 시작했을 법한 부분에는 자신 있게 그려진 선 밑으로 몇 방울의 물감 흔적이 엿보인다.

사비나도 나머지 세입자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4월 건물주인 교회로부터 방을 비우라는 편지를 받았다. 지난 6월에는 7월 31일까지 그곳을 떠나라는 공식적인 법적 공지를 받았다. 교회의 ‘재정 문제’에 대한 짤막한 언급이 설명의 전부였다. 세입자들은 이사할 곳을 찾느라 정신 없는 동안에도 벽화를 걱정했다. 그들은 교회가 그 건물을 세놓거나 매각하면 벽화가 파괴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교회는 아직 향후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뉴욕 예수 승천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조셉 즈윌링은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을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벽화의 처리 문제도 결정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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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버려진 핸드볼 코트 벽에 그려진 헤어링의 유명한 벽화 ‘마약은 나빠 (Crack Is Wack)’.

변호사들은 세입자들이 임대안정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지만 사비나와 5층에 사는 젊은 여성 야나 사베바를 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떠났다. ‘고다드 리버사이드 로 프로젝트’의 아론 크랫챗은 그레이스 하우스 세입자들이 그곳에 무기한 머무를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사는 사비나와 사베바에게 교회가 강제퇴거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금지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벽화의 훼손 방지를 주장하는 뉴욕 시의원 마크 레빈은 ‘벽화를 보호하는 확실한 방법은 기념물로 지정하는 것뿐’이라고 믿고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벽화의 보존은 사비나가 그 건물에 계속 머무르는 이유 중 하나다. 사비나는 자신과 사베바가 그곳에 사는 한 누구도 그 건물을 무너뜨리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전자 댄스 뮤직 행사 기획자이자 DJ로 일하는 소토는 지난여름 30여 년 만에 그레이스 하우스를 다시 찾았다. 그가 ‘잊혀진 벽화’라고 부르는 헤어링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다. 사비나가 문을 열어주자 두 사람은 함께 건물 곳곳을 둘러보며 각자가 아는 사연을 들려줬다. 옥상 정원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1980년대의 뉴욕 시에 대해 1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마약과 음주, 에이즈, 그리고 그들이 잃은 친구와 벽화에 대해.

소토가 “(벽화를) 한번 더 볼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자 두 사람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소토의 검정색 T셔츠 오른쪽 소매 아래로 희미한 문신이 보였다. 헤어링이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태투 아티스트 행키 팽키로부터 문신 기계 사용법을 배운 후 새겨준 것이다. 색이 바래 희미해졌지만 헤어링의 유명한 ‘배트맨’ 캐릭터를 알아볼 수 있다. 배에 ‘X’자가 새겨져 있고 벌린 두 팔 아래로 망토를 늘어뜨린 모습이다.

두 사람이 현관에서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소토는 사비나가 헤어링의 작품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벽화와 함께 살 수 있어 행운이지만 벽화도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여서 행운이다.”

소토가 떠난 뒤 사비나는 그레이스 하우스의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갔다. 4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수도 있겠지만 벽화를 한번 더 보려고 계단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 스태브 지브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