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이웃’하는 천상의 포도원

남아공의 케이프 지방은 아름다운 풍경과 훌륭한 와인, 맛있는 음식으로 세계 와인 투어의 명소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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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와인 산지 내의 프랑슈후크 지역.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포도원들의 다양한 테루아르에서 생산된 품질 좋은 와인을 맛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1980년대 남아공의 케이프 지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은 아프리카너(남아공의 백인) 민족주의의 요새였다. 케이프 와인 산지의 중심에 있는 대학 도시 스텔렌보슈는 1930년대 아프리카너 학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를 구상한 곳으로 경치가 아름답지만 상당히 지루하기도 하다. 그 이웃에 있는 위그노(프랑스의 칼뱅파 신도) 정착지 프랑슈후크는 은퇴한 백인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도시다. 이 지역은 와인과 미식 산업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나파밸리나 호주의 바로사, 뉴질랜드의 말보로와 비교할 때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지 거의 22년이 흐른 지금 이 지역은 남아공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한 곳으로 떠올랐다. 이 지역의 와인 산업은 여전히 백인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지지만(일부 농부와 지주 가문은 수세기 동안 이곳에서 살아 왔다) 흑인 사업가와 농부, 와인업자의 수가 갈수록 늘어난다. 이곳은 와인 산업이 신세계 와인업계의 다른 어떤 지역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붐을 이루면서 맛있는 요리의 중심으로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유한 외국인 여행객이 이곳에서 휴가를 즐기는데 그중 다수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와인 산지 내의 부동산을 사들였다. 버진그룹의 설립자 리처드 브랜슨은 2004년 몬트 로셀 와이너리 에스테이트를, 그라프 다이아몬즈의 창업자 로렌스 그라프는 2003년 들레어 에스테이트를 2200만 달러에 매입했다. 2013년에는 인도의 건강보험 및 텔레콤 재벌 아날지트 싱이 프랑슈후크의 포도원 200만㎡와 멀리넥스 패밀리 와인스의 지분, 그리고 프랑슈후크에서 가장 유명한 부티크 호텔 ‘르 카르티에 프랑세’를 사들였다.
이 지역의 와인 산지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케이프타운에서 그곳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남아공의 극심한 빈부차를 실감하게 된다. 케이프타운에서 80㎞ 거리에 있는 스텔렌보슈까지 가려면 케이프 평원에 널리 퍼져 있는 불법거주자촌을 지난다. 아프리카 빈곤 국가에서 유입되는 이민자로 갈수록 거대해지는 이 빈민촌은 이제 대서양 연안의 부촌과 비탈진 포도원만큼이나 케이프 지방을 대표하는 풍경이 됐다.
스텔렌보슈는 남동쪽으로는 용커슈크·드라켄스타인·시몬스버그 산맥에, 남쪽으로는 스텔렌보슈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남아공에서 가장 경치 좋은 길로 꼽히는 헬쇼크트 패스를 넘어가면 프랑슈후크 계곡 내리막길이 나온다.
프랑슈후크는 17세기 말 가톨릭교를 국교로 하던 프랑스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탈출한 신교도인 위그노 난민의 정착촌으로 시작됐다. 지금은 곡선미를 살린 박공 지붕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네덜란드식 건물들이 매력적인 작은 도시다. 와인 상점과 화랑이 즐비하고 훌륭한 레스토랑도 많다. IT 허브로 빠르게 발전 중인 대학 도시 스텔렌보슈는 여전히 이 지역의 사회정치학적 중심을 이루지만 관광객은 프랑슈후크를 더 많이 찾는다.
최근 스텔렌보슈에 갔을 때 얀 볼란드 코트제가 운영하는 브리젠호프 빈야즈에 들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이너리다. 코트제는 “스텔렌보슈 산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이 포도원은 스텔렌보슈와 가깝고 천국과도 이웃이다”고 말했다. 남아공 국가대표 럭비팀 출신으로 백인인 그는 아파르트헤이트가 극심했던 시절에도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하던 혁명가였다. 그는 농장 노동자들을 위한 이익분배 제도를 옹호하고 집권당인 아프리카너당의 진보 성향을 지지했다. 코트제는 케이프 지방의 와인업자들(특히 활기찬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전히 존경 받는다.
우리는 그가 만든 와인을 시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샤르도네, 혼합 품종의 적포도주, 피노 누아르, 그르나슈 등. 그리고 남아공 와인 산업의 진화와 정치적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다음 며칠 동안 남아공 최고의 포도원 몇 군데를 더 방문했다. 브리젠호프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워터포드 에스테이트, 스텔렌보슈의 반대편 끝에 있는 카논코프(보르도 블렌드와 폴 사우어 등 남아공 최고 품질의 레드 와인을 생산한다), 헬슈크트 패스 정상에 있는 텔레마 마운틴 빈야즈 등이다.
프랑슈후크에서는 요한 루퍼트가 운영하는 로르마린 포도원을 방문했다. 그루트 드라켄스타인 산자락의 넓은 땅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근처의 프랑슈후크 자동차 박물관에서는 모델 T 포드부터 1950년대 스포츠카와 페라리 엔조, 메르세데스 벤츠 DTM 쿠프 등 현대의 클래식까지 다양한 빈티지 자동차를 전시한다.
남아공의 케이프 지방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와 호주 바로사와 함께 와인 관광을 세련된 사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포도원들은 다양한 테루아르(와인의 개성과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환경)에서 생산된 품질 좋은 와인을 맛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런 경험을 한 관광객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때 맛본 와인과 특별한 인연을 이어간다.
하지만 음식도 한몫한다. 케이프 지방에서 와인 투어를 할 때 아주 훌륭한 레스토랑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식사할 수 있다. 남아공을 방문하는 유럽인은 늘 그곳의 음식과 와인이 상대적으로 싸다고 느껴 왔다. 하지만 최근 란드화의 가치 하락으로 남아공은 고급 음식을 세계에서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이 됐다.
스텔렌보슈와 프랑슈후크 지역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르 카르티에 프랑세 호텔의 ‘테스트 키친’은 생수업체 산 펠레그리노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50’에 이름을 올렸다. 이곳에서는 9코스짜리 테이스팅 메뉴의 가격이 70달러도 안 된다. 또 들레어 그라프 에스테이트의 아시아 레스토랑 ‘인도차이나’에서는 5코스짜리 주방장 특선 메뉴가 약 40달러다. 그라프의 길 건너편에 있는 ‘토카라’의 주방장 리처드 카르스텐은 프랑스와 아시아의 퓨전 요리를 자주 선보이며 테이스팅 메뉴가 약 30달러다.
란드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서 남아공 와인 산지의 포도원과 값싸고 맛있는 레스토랑들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알찬 관광지 중 하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산자락에 있는 비탈진 포도원들을 찾아가봐야 할 진짜 이유는 값싼 음식이 아니라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 그레이엄 보인튼
[ 필자는 영국 태생의 짐바브웨 기자 겸 여행작가다. 이 기사는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 ‘아프리카 트래블’의 협찬으로 진행된 여행을 바탕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