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아닌 시민이 만드는 페스티벌

2017년 ‘문화의 도시’ 프로젝트 공동 주최하는 덴마크의 오르후스와 영국의 킹스턴-어폰-헐, 1년 내내 각종 예술 축제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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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후스에서 공연되는 현대 발레 ‘트리 오브 코드(Tree of Codes)’.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동해안의 오르후스와 영국 북동해안의 킹스턴-어폰-헐(줄여서 ‘헐’이라고 부른다) 사이에는 725㎞의 차가운 북해가 가로놓여 있다. 하지만 이 두 항구 도시는 공통점이 있다. 부둣가를 걷다 보면 변화의 물결이 감지된다는 점이다.

헐의 해변에 세워진 수족관 겸 해양 연구소 ‘더 딥(The Deep)’은 배 모양의 초현대적 건물로 뱃머리가 험버 강 어귀 쪽을 향하고 있다. 항구 옆의 오래된 청과시장 창고와 점포 자리엔 예술·문화 공간과 공예공방들이 들어섰다. 한편 말쑥하게 새 단장을 마친 오르후스의 부둣가에서는 우주선 모양의 ‘독1(Dokk1)’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 완공된 초현대식 건물로 공공 도서관과 문화센터가 자리 잡았다. 헐과 오르후스가 이렇게 활기를 띄는 이유는 이 두 도시가 제휴해 2017년 ‘문화의 도시’로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오르후스는 키프로스 파포스와 함께 가장 최근에 유럽연합(EU)의 ‘문화 수도’ 타이틀을 획득한 도시다. 경쟁을 통해 선정되는 이 타이틀은 1985년 그리스 아테네에 처음 주어졌고 요즘은 해마다 두 도시에 수여된다. 한편 헐은 영국의 ‘문화 도시’ 경쟁에서 북아일랜드의 데리-런던데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영국의 문화 도시 경쟁은 1990년과 2008년 글래스고와 리버풀이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된 뒤부터 4년에 한 번씩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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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미술가 스펜서 튜닉은 지난해 7월 설치미술 작품 ‘헐의 바다(Sea of Hull)’에 3000여 명의 헐 시민을 참여시켰다.

오르후스와 헐은 올해 내내 각종 예술 축제와 지역 행사를 공동 주최하기로 약속했다. 오르후스에서는 박물관 지붕 위에서 바이킹을 주제로 한 공연이 열리고 영국 가수 겸 운동가 아노니가 1년 내내 상주하며 활동을 펼친다. 또 2016 리우 올림픽의 공식 조명 디자이너였던 더럼 머렝기의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이 전시되고 노르딕 음악 페스티벌이 열린다.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에 수록된 모든 곡을 연주하는 라이브 공연도 열린다. 오르후스의 문화 달력은 올 1년 내내 각종 행사로 가득하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프로그램이 계획됐다”고 헐의 2017년 CEO 마틴 그린(2012년 런던 올림픽 개·폐막 행사를 주관했다)이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2주일 단위로 계획되는 여느 문화· 예술 축제와는 리듬이 사뭇 다르다.”

한 도시에서 1년 내내 축제를 개최하려면 예술 애호가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오르후스의 2017년 CEO 레베카 매튜스(덴마크인 남성과 결혼한 영국인)는 “모든 사람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폭넓고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다.

매튜스 CEO의 프로그램은 고위 공무원들의 지시가 아니라 시민과의 논의를 토대로 했다. 그는 이것이 덴마크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덴마크의 사회 생활에서는 특히 어린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매튜스는 지난 1월 20일 18개 지자체를 중심으로 한 어린이 참여 축제 ‘드림랜드’로 프로젝트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1월 21일 새벽 오르후스 곳곳에서 자전거 퍼레이드가 시작돼 시청 앞에 집결하면서 개막식이 열렸다.

하지만 이 쌍둥이 프로그램이 열리는 두 도시의 경제적 상황은 사뭇 다르다. 오르후스는 유엔 세계 행복지수에서 최상위권을 맴도는 덴마크에서도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여행잡지 론리 플래닛은 오르후스를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멋진 곳’이라고 평했다. 이 도시에서는 현란하기보다는 절제된 듯 차분하면서도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도심의 라틴 쿼터에는 디자이너 부티크와 학생들로 활기가 넘치는 클럽들이 자리 잡았다.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가면 세계 수준의 미술관들과 ARoS 예술 센터가 눈길을 끈다. 매튜스에 따르면 오르후스가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는 경제위기나 침체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도시 부흥보다는 지속가능성과 다양성, 민주주의 등 범유럽적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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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의 해변에 세워진 수족관 겸 해양 연구소 ‘더 딥(The Deep)’. 항구 옆의 옛 청과시장 자리엔 예술·문화 공간과 공예공방들이 들어섰다.

반면 헐은 이번 프로젝트에 경제적으로 큰 기대를 건다. 이 지역은 1970년대 이후 연해무역과 어업의 쇠퇴로 탈산업화의 피해가 극심했다. 부둣가 뒤쪽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기념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구도심의 몇몇 아름다운 거리 옆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후 새로 조성된 매력 없는 거리들이 눈에 띈다.

헐은 2015년 영국 138개 도시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평균 임금이 가장 낮고 삶의 질 지수는 꼴찌에서 두 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국민투표에서 역내 유권자의 63%가 유럽연합(EU) 탈퇴를 지지해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드러냈다. 국민투표 다음 날 아침 그린 CEO는 팀원들에게 ‘문화의 도시’ 프로그램으로 민심 분열을 극복하자고 독려했다. 그는 팀원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이렇게 썼다. “국민투표에서 EU 존속이나 탈퇴 중 어느 쪽을 지지했건 모든 시민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고 한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헐의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대중의 참여를 프로젝트의 핵심으로 삼았다. 시민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직원과 자원봉사자의 네트워크를 조직해 주인 정신을 북돋웠다. 시의회는 ‘문화의 해’에 대한 지지율을 20%에서 80%로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미국인 미술가 겸 사진가 스펜서 튜닉은 지난해 7월 설치미술 작품 ‘헐의 바다(Sea of Hull)’에 3000여 명의 헐 시민을 참여시켰다. 그는 참가자들을 페런스 아트 갤러리에 모아 놓고 그들의 알몸에 여러 색조의 푸른색 물감을 칠한 다음 집단 누드 사진을 찍고 거리 행진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한 시민은 “평생 이렇게 해방감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헐과 오르후스는 각각 시립극장에서 프로그램을 개막했다. 헐의 프레젠테이션은 지역사회를 중심에 둬 따뜻하고 진심 어린 느낌을 줬다. 자원봉사자들이 소울 명곡들을 합창했다. 한편 오르후스의 시사회에서는 더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매튜스 CEO와 프로그램 감독 율리아나 잉베르그가 현란한 맛보기 비디오를 틀어줬다. 덴마크어로 공식 환영 연설을 시작한 야콥 분스가아트 오르후스 시장은 “영어로 말해야 유럽 어린이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겠느냐”는 한 젊은이의 제안(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른 것)을 받아들여 영어로 연설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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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후스의 부둣가에 세워진 우주선 모양의 ‘독1(Dokk1)’에는 초현대식 공공 도서관과 문화센터가 자리 잡았다.

현재로선 헐의 프로젝트는 지방색이 짙은 반면 오르후스는 훨씬 더 세계적인 스타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린 CEO는 시간이 갈수록 국제적인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양쪽 프로그램의 지도자들은 예술에 초점을 맞춘 한 해가 도시의 평판과 분위기뿐 아니라 경제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런 프로그램들의 성과가 ‘문화는 투자이며 보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매튜스 CEO는 말했다. 2013년 유럽 의회가 진행한 ‘문화 수도’ 벤처 사업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이런 축제들의 성과는 도시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분석에서는 “1990년 영국 글래스고의 경우 이런 축제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리버풀은 ‘전례 없는 성장’을 이룩하는 계기가 됐다”고 결론 내렸다. 그린 CEO는 “이런 프로그램의 성과는 수학적·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자부심·자신감 같은 무형의 보상도 따른다”고 말했다. “자신감이 있는 도시는 원하는 일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글래스고나 리버풀처럼 헐도 문화를 도시 부흥의 수단으로 삼았다. 2014년엔 독일 전기·전자 업체 지멘스가 풍력 터빈 생산에 1억9600만 달러를 투자해 일자리 전망을 밝게 했다. ‘문화의 도시’ 프로젝트는 이 도시를 환경적·산업적으로 쇄신하는 더 광범위한 계획의 일환이다. “아무도 이곳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새 일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린 CEO는 말했다. “예술은 복지다. 그것은 고용기회와 건강, 교육 증진에 도움이 된다.”

예술은 또 관계 형성에도 좋다. 헐과 오르후스도 흑해 건너로 우호의 손길을 뻗쳐 맞잡지 않았는가? 이 두 도시는 ‘블래스트 티어리’(영국 남해안에 자리 잡은 인터렉티브 예술단)에 2097년의 삶을 상상하는 새로운 작품을 공동 의뢰했다. 두 도시는 또 희한하게도 유사성이 많다. 양쪽 모두 오래된 항구 도시로 인구가 약 26만 명으로 비슷하며 2016년 사망한 세계적 팝 스타 2명의 백뮤지션을 배출했다. 프린스의 베이스 주자였던 이다 닐슨은 오르후스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헐에서 자라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겸 편곡자 믹 론슨은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 밴드의 일원으로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두 도시 모두 더 훌륭한 예술의 장을 펼치고 더 많은 청중과 방문객을 맞아들이길 바란다. 하지만 시민들에겐 알몸에 푸른 물감을 칠한 동료 시민들이 거리를 메우고 새벽에 수천 대의 자전거 행렬이 시내를 달리는 장면이 더 깊은 감동을 안겨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 보이드 턴킨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