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살리는 ‘비폭력’ 전장을 가다

영화 ‘핵소 고지’의 주인공 앤드류 가필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기 없이 75명의 목숨 구한 의무병 역할 훌륭히 소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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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가필드는 뜻밖의 전쟁 영웅이 되는 평화주의자 데스몬드 도스 역할을 맡았다.

줄거리와 대본은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를 만드는 데 기본적인 요소다. 톰 행크스나 메릴 스트립처럼 재능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더라도 그 기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그들의 재능이 빛을 발하지 못한다. 물론 모든 요소가 잘 들어맞으면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겠지만 탄탄한 줄거리의 중요성을 부인할 순 없다. ‘핵소 고지’(국내 개봉 2월 22일)의 멜 깁슨 감독은 특별한 이야기를 선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데스몬드 도스(앤드류 가필드)는 조국에 헌신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의무병으로 자원한다. 도스는 연합군 의무병으로 일본 오키나와 공격에 참여하지만 총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전장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보다는 살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적진 한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부상병들을 대피시킨다.

이야기는 3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도스의 캐릭터와 그가 평화주의자가 된 배경을 소개하고, 그가 훈련 도중 부닥치는 문제점을 조명하며, 마지막으로 전장의 상황을 묘사한다. 전반부에서는 모든 일이 잘 돼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스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도 성격 좋은 젊은이로 자라난다. 그는 동네 간호사 도로시(테레사 팔머)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는 도스의 비폭력적인 태도를 지지한다.

도스가 도로시와 첫 키스를 하고 예전에 형과 함께 걷던 길을 그녀와 함께 걸으며 즐거워하는 걸 보면서 관객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가필드의 따뜻한 이미지는 도스라는 사랑스런 캐릭터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관객은 도스가 겁쟁이라고 비난 받고 동료 병사들과 장교들로부터 심한 매질과 괴롭힘을 당할 때 마음이 몹시 아프다. 영화 속 병사와 장교들은 도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가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지켜본 관객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도스를 그런 부당한 괴롭힘으로부터 구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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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유증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도스의 아버지 역을 맡은 휴고 위빙(가운데).

깁슨 감독의 전작들에 비춰 볼 때 많은 이들이 그에게 전쟁 영화의 감독을 맡기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영화엔 잔혹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지만 액션 장면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용기는 높이 살 만하다. 관객은 폭발물과 기관총이 인체에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목격한다. 하지만 잔혹한 장면 중에 불필요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또한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을 공포가 실감나게 조명되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 상황에서 도스가 총을 한 방도 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또한 잔혹한 장면마다 동료애가 눈길을 끈다. 부상당한 병사들이 서로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고향에 있는 애인 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달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처럼 관객이 각각의 캐릭터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의 별명까지 알게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 ‘핵소 고지’가 단순한 전쟁영화를 뛰어넘는 이유다. 관객은 도스뿐 아니라 다혈질의 훈련 담당 부사관(빈스 본)과 냉담한 대위(샘 워싱턴), 공격적인 사병(루크 브레이시)도 이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기를 바란다.

이 작품에서 기독교 문제를 다루는 깁슨 감독의 태도는 다소 놀랍다. 도스가 성경을 읽는 장면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등 영화 전반에 걸쳐 종교가 기저에 깔려 있는 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종반으로 가면서 갑자기 종교가 전면으로 떠오르면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그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한 도스의 행동은 놀랍지만 영화의 대부분에서 그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그의 의지와 인간 정신의 승리로 묘사된다. 하지만 깁슨 감독의 연출 방식이나 촬영감독 사이먼 더건의 영상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다행히도 가필드의 뛰어난 연기력으로 겸손한 주인공 도스가 빛을 발한다. 도스는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동정심을 발휘해야 하는 대목에서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과감하게 행동하는 캐릭터다. 가필드는 남부 특유의 느린 말투에 꽃미남 외모로 관객을 사로잡으면서 도스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쓸 때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긴장의 끈을 잠시도 놓을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이 끝난 뒤 영화에 묘사된 실제 인물들과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도스와 그의 동료 병사, 상관들까지. 화면에 흐르는 설명문에 따르면 도스는 오키나와 전투의 그 운명적인 며칠 동안 75명의 목숨을 구해 명예훈장을 받았다. 그가 직접 화면에 나와 전장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경외심이 절로 든다. 전기 영화에 이렇게 실제 중심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 방식은 영화에서 방금 본 내용을 훨씬 더 강력하고 감동적으로 각인시켜 여운을 오래 남길 듯하다.

– 에이미 웨스트 아이비타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