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기쁨 그 두 얼굴의 ‘가족’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과거의 상처를 강인하고 무뚝뚝한 기질로 이겨내는 남자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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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 챈들러(왼쪽)는 형이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 겸 감독 케네스 로너건은 마치 실수투성이 교구민들의 고해를 듣는 너그러운 신부처럼 캐릭터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으며 오히려 은근히 재미있어 하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한다. 로너건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국내 개봉 2월 15일)에서 케이시 애플렉은 미국 보스턴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를 연기한다. 말수가 적은 그는 건물 지하실에서 혼자 살면서 낮에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눈을 치우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한다.

늘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챈들러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아주 먼 곳에 있는 듯 느껴진다. 그의 주변에는 음울하고 침체된 분위기가 감돈다. 바에서 혼자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며 누군가 그를 삐딱하게 바라보면 선생님에게 대드는 아이처럼 싸움을 건다. 그에게 주먹질은 매일 빼놓을 수 없는 일과처럼 보인다. 존재에 대한 세금이랄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가 1시간가량 진행돼서야 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챈들러는 형 조(카일 챈들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맨체스터(보스턴 북쪽 해안의 작은 어촌)로 돌아간다. 그리고 형이 10대 아들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패트릭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여서 아이를 돌볼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는다. 챈들러는 패트릭에게 “내가 너한테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할 때) 콘돔을 사용하라고 말해줘야 하니?”라고 묻는다.

어떤 면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로너건 감독의 데뷔작 ‘유 캔 카운트 온 미’(2000)를 발전시킨 버전으로 보인다. 2000년대의 가장 감동적인 영화로 꼽히는 이 작품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남매가 서로 판이한 인생을 살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모여 살게 되면서 누이의 어린 아들을 함께 키우는 이야기다.

로너건 감독은 돌볼 사람이 필요한 아이한테 (가족 중) 누군가가 어쩔 수 없이 부모 역할을 하게 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마가렛’(2011)도 그런 류의 작품이다. 9·11 사태 이후의 뉴욕에서 치명적인 버스 사고에 연루돼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녀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편집상의 문제와 로너건 감독과 제작자 간의 소송으로 몇 년 동안 발이 묶였던 이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상처 입은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다. 비평가들은 로너건 감독을 영화사와의 불화로 고초를 겪었던 오손 웰스에 비유했다. ‘마가렛’은 나름의 아름다움과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난파선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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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의 전 부인 랜디 역의 미셸 윌리엄스.

하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항하는 배처럼 매끈하게 흘러간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우리는 챈들러와 그의 전 부인 랜디(미셸 윌리엄스), 그리고 세 자녀의 행복했던 시간을 엿볼 수 있다. 마침내 플롯의 전환점에 다다랐을 때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가 흐르면서 극적인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이 대목은 영화 전체가 그렇듯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알비노니의 음악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보통사람들’(1980)처럼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만 그렇게 감상적이진 않다. 또 가족 구성원들이 술에 취해 말싸움을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와해된 가정의 이야기에 비극과 희극을 교묘하게 섞어 넣은 달콤씁쓸한 인디 영화와도 다르다.

영화의 대부분은 챈들러가 패트릭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따라간다. 챈들러는 패트릭을 학교나 밴드 연습실, 또는 여자친구 집까지 차로 바래다준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가족 간에 싸움이 벌어진다. 패트릭의 여자친구는 그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자리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영화 ‘스타트렉’에 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리자 “지금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로너건 감독은 비통한 대목을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 특유의 강인하고 무뚝뚝한 기질로 걸러서 보여준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비아냥거리는 말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행동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 인간의 동기와 행동에 관한 날카롭고 명백한 진실이 담겨 있다. 유머는 심적 고통을 더 심화시키고 고통은 유머를 더 빛나게 만든다.

로너건 감독은 슬픔에 겨워 우는 사람들 속에 섞여 냉랭한 얼굴로 서 있는 애플렉을 보면서 그가 챈들러 역할에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몰입하는 그의 연기가 일품이라고 느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는 요동치는 내면에서 퍼져 나오는 희미한 울림과 같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영화 막바지에 단 한 줄의 대사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어쩌면 여배우로서 그녀의 존재 이유가 이 한 장면에 담겼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슈퍼마켓에서 챈들러와 우연히 마주친 뒤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다가 “사실 난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 한마디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영화의 종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톰 숀 뉴스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