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의 벽 허문 위대한 꿈

시어도어 멜피 감독의 ‘히든 피겨스’,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흑인 여성 3명의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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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출연진. 메리 잭슨 역의 자넬 모네, 캐서린 존슨 역의 타라지 P. 헨슨, 도로시 본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왼쪽부터).

타라지 P. 헨슨과 자넬 모네, 옥타비아 스펜서가 시어도어 멜피 감독의 전기적인 코미디 영화 ‘히든 피겨스’(국내 개봉 3월 23일)에서 호흡을 맞췄다. 1962년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흑인 여성 3명의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전기 영화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성적이 좋은 편이다. ‘철의 여인’(2011), ‘링컨’(2012), ‘셀마’(2014),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등 최근 몇 년만 돌아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전기 영화라는 사실 외에 분위기가 어둡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번 아카데미 시즌에 ‘히든 피겨스’가 희귀한 보석처럼 여겨졌던 이유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의 업적에 관한 대다수 최근 영화와 달리 밝고 명랑한 분위기다. 1960년대 미 항공우주국(NASA) 컴퓨터 부서에서 일하던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과 그녀의 친구들 메리 잭슨(자넬 모네),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에 관한 이야기다. 존슨은 수학의 천재였고 잭슨은 엔지니어링에 남다른 안목이 있었으며 프로그래머인 본은 리더십이 뛰어났다.

이들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생활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이 문제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NASA라고 해도 별 다를 게 없었다(NASA의 가장 오래된 연구소인 랭리 센터는 보수적인 버지니아 주에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주비행에서 미국을 앞지르자 NASA의 지도부는 러시아와 경쟁하려면 우수한 인재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존슨은 NASA의 최고 인재들이 모이는 우주탐사팀의 일원이 됐다. 그녀는 우주 프로그램 총책임자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 밑에서 우주인 존 글렌을 지구 궤도로 쏘아 올리기 위한 작업에 참여했다. 한편 잭슨은 상사의 격려로 법을 어기고 (당시 흑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엔지니어링 수업을 들으며 업무에 필요한 자격을 갖췄다. 또 본은 새 운영체제를 도입해 폐지될 위기에 처했던 컴퓨터 부서를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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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는 인종 불평등이나 성차별 같은 문제들을 꽤 과감하게 제시한다.

모두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이 여성들이 영화에서처럼 비교적 쉽게 그런 업적을 이뤘을 것 같진 않다. 이 영화의 대본을 쓴 멜피와 앨리슨 슈로더는 대다수 전기 영화와 달리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를 다뤘기 때문에 역사적 정확성과 관련된 부담이 적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실제 이야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영화를 재미있게 이끌면서 주인공 3인방을 호감 가는 캐릭터로 묘사했다. 관객이 실제 이야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들이 영화적 효과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퍼렐 윌리엄스의 현대적인 사운드트랙이 이런 시대극에 도입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인공 배우 3인방은 다소 감상적인 스토리를 잘 풀어나갔다. 본 역의 스펜서는 따뜻하고 조용하면서도 마음먹은 일은 꼭 관철시키는 강인한 여인상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반면 솔직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잭슨 역을 맡은 모네는 지나친 자신감과 불안하고 내성적인 측면 사이를 오가는 섬세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는 세 주인공 중에서도 특히 존슨에게 초점이 맞춰져 헨슨은 가장 감성적인 장면들을 소화해야 했다. 존슨은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가 그녀에게 “자주 자리를 비우는 이유가 뭐냐”고 핀잔을 주자 자신이 센터에서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뛰어다녀야 하는 걸 알기나 하느냐고 따진다. 또한 자신이 쓰는 커피 포트에 손을 대기조차 싫어하는 동료들에게 야속한 감정을 토로한다. 매우 감동적이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장면이다. 하지만 헨슨은 이와 정반대로 명랑·쾌활한 순간들도 잘 소화해 연기 폭이 넓은 배우임을 입증했다.

이 영화엔 주인공이 3명이나 되다 보니 조연 캐릭터들이 빛을 못 본다. 수석 엔지니어 역을 맡은 짐 파슨스는 존슨의 노고를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짜증스런 성차별주의 자로만 묘사된다. 커스텐 던스트는 그보다 약간 부드럽긴 하지만 언제나 심각한 표정의 감독으로 나온다. 다른 조연 배우들도 별 볼 일 없는 캐릭터를 맡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예를 들어 마허살라 알리는 군 장교 짐 역을 맡아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캐릭터를 섹시하게 표현하며 이 영화에 부족한 로맨스의 분위기를 살짝 불어넣는다. 코스트너 역시 깐깐한 상사의 전형을 뛰어넘어 부하직원을 인종이 아닌 업무 능력으로 평가하는 호감 가는 전문가 캐릭터로 배역을 멋지게 살렸다.

‘히든 피겨스’는 재미있으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 장면이 많다. 인종 불평등이나 성차별 같은 주제를 회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 꽤 과감하게 그런 문제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멜피 감독은 고정관념이나 연민이 아니라 성취와 업적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품이 ‘여성 영화(chick flick)’의 대안이 될까? 이 영화에는 여자의 변신이나 뻔한 꽃미남 배우, 어색한 이야기 전개, 남녀의 만남이라는 진부한 스토리는 전혀 없다. 대신 경탄할 만한 여성들에 관한, 또 그들을 겨냥한 교훈적이고 가슴 아픈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주인공 3인방이 우리에게 주는 한 가지 교훈은 ‘불가능은 없다’는 것이다.

– 에이미 웨스트 아이비타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