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난 구멍 속에 호빗이 살았다”

톨킨의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플롯에 따라 성장하고 변화하는 캐릭터들로 새로운 판타지의 세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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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호빗’.

판타지의 정확한 정의와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과 팬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베오울프’ 같은 서사시도 판타지에 속할까? 그 기원은 그리스 신화일까, 아니면 중세시대의 낭만시일까? 하지만 J.R.R. 톨킨이 판타지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톨킨이 판타지를 발명하진 않았지만 ‘호빗’과 ‘반지의 제왕’ 등의 작품으로 수많은 독자의 마음 속에 그 정의를 심어줬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요즘도 많은 판타지 작가에게 이 장르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톨킨의 소설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판타지 장르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왔다. 판타지 소설은 세계 곳곳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을 차지할 뿐 아니라 영화와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누린다.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HBO 방송의 ‘왕좌의 게임’은 21세기의 문화적 시금석이 됐다. 또 톨킨의 작품을 영화화한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 J.K. 롤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었다. 이 모두가 작가로서 톨킨의 엄청난 성공이 가져온 뜻밖의 결과다.

톨킨은 1937년 ‘호빗’의 출판으로 판타지 장르에 첫 족적을 남겼다. ‘호빗’은 서사 장편 소설인 ‘반지의 제왕’보다 짧고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아동용 판타지를 새롭게 정의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톨킨은 19세기에 개발된 ‘별세계(otherworld)’ 판타지를 아동용으로 만들면서 거기에 민속과 스칸디나비아 신화를 혼합했다”고 판타지 학자이자 작가인 파라 멘들슨이 말했다. “그것은 크나큰 변화였다.”

‘호빗’의 빌보 배긴스가 사는 세계에는 마법의 반지와 용이 등장하지만 P. L. 트레이버스의 ‘메리 포핀스’나 L.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와는 달리 인과의 개념과 현실성이 느껴진다. “톨킨은 E.B. 화이트 등 미국의 대다수 판타지 작가들과 달리 엉뚱하고 기발한 전개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멘들슨은 말했다.

톨킨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플롯에 따라 성장하고 변화하는 캐릭터들로 채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처럼 주인공이 다양한 모험을 겪으면서도 고정된 캐릭터를 유지하는 기존의 판타지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다. “톨킨은 캐릭터들이 학습을 통해 성장한다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멘들슨은 말했다. “‘호빗’의 배긴스 같은 경우 이상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캐릭터가 변화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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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빗’과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었다.

해리 포터와 캐트니스 에버딘(‘헝거 게임’의 여주인공)의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톨킨이 ‘청소년 소설(Young Adult fiction)’이라고 불리는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가공의 세계에 빠져드는 청소년 독자를 겨냥하며 주인공의 성장과 진보를 강조하는 장르다.

‘호빗’이 새로운 판타지 소설의 맛보기였다면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의 미래를 활짝 열었다. ‘호빗’의 세계도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했지만 ‘반지의 제왕’은 그 세계를 한층 더 확장시키고 깊이를 더했다. 수천 년 전의 전쟁을 기리는 시를 읊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그들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사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궁극적으로 선하지만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해 막강한 악의 세력에 대항해 싸우는 이야기는 인기가 매우 높아 많은 판타지 작가가 즐겨 채택한다.

11편의 판타지 소설을 쓴 테리 브룩스는 ‘샤나라의 검(The Sword of Shannara)’ 주석판에 이렇게 썼다. “난 월터 스콧 경과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 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유럽의 모험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고 난 뒤에 ‘샤나라의 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내가 필요로 했던 기반이 판타지 장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령 어떤 판타지 작가가 ‘선한 사람들이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플롯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해도 그는 자신이 시류를 거스른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고 마틴이 문화잡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것은 내가 존경하면서도 반대하는 톨킨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살인과 성폭행, 배신에 대한 노골적 묘사로 가득 찬 마틴의 암울하고 섬뜩한 세계는 톨킨의 작품에 대한 그의 반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단한 성공을 거둔 마틴의 작품은 물론 톨킨 이후 나온 수많은 판타지 소설들은 이 한 문장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땅에 난 구멍 속에 호빗이 살았다(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 (톨킨이 ‘호빗’의 첫머리에 쓴 문장이다.)

[박스기사] 아내 사랑으로 엮은 위대한 이야기

J.R.R. 톨킨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전쟁터에서 참호열에 걸려 영국 요크셔로 돌아가 1년 동안 요양했다. 그 시기에 톨킨은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초석이 되는 이야기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바다 건너편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톨킨과 그의 부인 에디스는 평화로운 요크셔의 숲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에디스는 숲 속에서 톨킨을 위해 춤추기도 했는데 그 순간은 톨킨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각인됐다. 그리고 그녀는 1971년 세상을 떠났다.

톨킨은 에디스가 숲 속에서 춤을 추던 그날을 떠올리며 러브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에디스를 엘프의 공주 루시엔으로, 자신을 인간 베렌으로 묘사했다. 에디스가 세상을 떠나자 톨킨은 묘비에 ‘루시엔’이라는 이름을 새겼고 나중에 자신의 묘비에는 ‘베렌’이라고 써달라고 요청했다.

‘호빗’에서 베렌은 악의 세력 모르고스에 대항하던 집단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간이다. 모르고스가 중간계의 대부분을 정복하자 베렌은 엘프의 땅 도리아스에 숨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생의 연인 루시엔을 만난다. 하지만 루시엔은 불멸의 엘프인 반면 그는 언젠가는 죽을 운명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하는 루시엔의 아버지 싱골왕은 베렌에게 결코 완수하지 못할 어려운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한다.

왕은 베렌에게 모르고스가 훔쳐간 보석 실마릴을 되찾아 오면 루시엔과 결혼시켜주겠다고 말한다. 베렌과 루시엔은 마침내 모르고스에게서 그 보석을 빼앗지만 그 과정에서 베렌이 죽고 그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루시엔마저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죽음의 심판 발라 만도스를 감동시켜 두 사람 모두 부활해 (적어도 한동안은) 행복하게 산다.

톨킨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마릴리온’과 ‘반지의 제왕’을 썼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는 이 이야기 말고도 플롯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행한 연인들의 이야기가 더 있다. 베렌과 루시엔의 후손인 엘론드와 그의 딸 아르웬, 그리고 그 연인인 아르곤의 이야기는 톨킨이 이 주제를 ‘반지의 제왕’ 최종 원고까지 줄곧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톨킨의 아들 크리스토퍼는 이 이야기가 톨킨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가 처음 이 이야기를 쓴지 100년이 지난 최근 ‘베렌과 루시엔’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오는 5월 출간을 앞둔 이 책은 톨킨의 팬들에겐 손꼽아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 앨리샤 코트 뉴스위크 기자